서울의 어느 언덕길 주택가 동네. 이제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보이는 소년 '동동'은 근처 공원에서 구슬을 갖고 놀지만,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 뿐, 동동이에게도 구슬에도 별 관심이 없다.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자 의기소침해진 소년은 이젠 노견이 된 반려견 '구슬이'와 함께 공원을 떠난다.
소년이나 개나 축 늘어진 채로 집에 돌아가는 길, 어쩌면 구슬이 매력이 없어서일지 모른다며 포기하지 못한 동동이는 동네 문방구에 들른다. 눈에 번쩍 띄는 구슬이 보여 집어보니 구슬이 아니라 알사탕이다. 문방구 할아버지는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알사탕을 동동이에게 넘기고, 집에 돌아온 소년은 군것질 겸 포장을 풀고 마음에 드는 걸 하나 냉큼 입에 문다.
바로 그 순간 마법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늘 일이 바쁜 아빠 때문에 혼자 노는 데 익숙한 동동이에게 상상하지 못한 대화의 장이 열린 것이다. 과연 알사탕에는 어떤 마법이 깃들어 있을까?
흔해빠진 양산형 동화와는 '보법' 자체가 다르다!
▲<알사탕> 스틸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알사탕>은 백희나 작가의 그림동화 원작을 충실히 영상화한 작업이다. 동명의 작품 외에도 후반부에 연작에 해당하는 프리퀼 [나는 개다] 일부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들을 애독해 왔던 이들이라면 더없이 반가운 선물인 셈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 연령대 아이들에 목표를 맞춘 그림동화라면 성인 관객들은 대개 제치고 흘려보낼 테지만, <알사탕>은 천편일률적인 양산형 동화책과는 속된 말로 '레벨'이 다르다. 그런 원작을 순도 높은 재현도로 영상화한 애니메이션 역시 원래 장점을 고스란히 보유함은 물론, 활동사진만의 매력을 보강해 상영시간 내내 늘어질 틈이 없다. 성공적인 영상화의 모범사례 같은 결과물이다.
흔히 저연령 청소년 대상 동화라고 하면 조금만 권장 연령대를 지나도 외면하기 일쑤다. 판에 박힌 내용과 소재, 예상 가능한 교훈적 결말에 그친다는 걸 간파하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가 문맹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서양 근대국가 건설과 함께 '국민교육' 체계가 출범할 때 국가주의 '계몽' 목적과 연동한 동화문학이 번성하던 역사적 기억과 연결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사실관계와 동떨어진 숱한 위인전, 적당히 대충 끼워 맞춘 세계명작동화의 날림 번역에 익숙한 이유다. 그런 이들에게 <알사탕>은 '또 학부모 등골 빼려는 기획이로군. 흥!' 하기 딱 좋은 표적인 셈이다.
그러나 원작을 몰라도 일단 한 번 속는 셈 치고 본다면 생각이 달라지는 건 금방이다. 요즘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공통으로 실종된, '평범한 아이'와 그들이 뛰어노는 '골목길 동네'가 <알사탕>의 세계 속에는 가득 넘실거린다. 동동이도, 구슬이도 정말 길 가다 보면 옆을 스치고 지날 법한 흔하디흔한 존재들이다. 아이돌 뺨치게 잘 생기고 예쁜 비현실적 외모와 체형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 데나 돌 던지면 맞고 아야 할 그런 캐릭터가 괜히 반갑다. 자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빠나 늘 큰 바위 얼굴처럼 손자를 돌보던 할머니의 얼굴도 어릴 적 추억 속 바로 그런 인상 자체다.
공들여 재현한 대도시 뒤안길 풍경도 정겹다. 천편일률적으로 도시의 색깔을 덧칠하고 마는 일방적 재개발 이전의 색깔 진한 골목의 기억이 향수를 자극한다. 아이들 데리고 시간 보내러 갔다가 정작 아이는 딴청을 부리고 부모가 감회에 젖어 몰입하기 딱 좋은 내용이다.
원작자가 자신의 초등학교 1학년 막 입학한 자식을 모델로 삼았다는 동동이의 정말로 평범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울퉁불퉁 삐죽삐죽 굴곡이 매끈하고 화사한 요즘 화면 속 캐릭터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언제든 화면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만큼 친근한 느낌이다. 소년에게 목줄이 감긴 채 자기 페이스를 잡지 못해 애먹는 구슬이 역시 잔뜩 멋낸 품종견과는 확연히 다른 입체감을 드러낸다.
동화라 만만히 볼 '급'이 아닌, 도시형 판타지의 매력
▲<알사탕> 스틸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그런 익숙한 존재들의 일상에 갑자기 초현실적 판타지가 끼어든다. 물론 다른 시대로 차원 이동을 한다거나 그로 인해 인생역전이 날 일은 없다. 그들의 일상과 현실은 계속 이어질 테지만, 아주 살짝 조금의 변화가 가미되며 생활 속 공백이 채워지는 정도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유년 시절의 그런 순간적인 체험은 인생의 균형추를 바꿀 만큼은 위력이 세다. 그런 '결정적 순간'을 원작 동화와 애니메이션은 마치 신기루처럼 스치는 마법의 찰나로 구현한다.
대개 현실의 한계를 비현실적 수단으로 뛰어넘지만, 정작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겐 대리만족에 그칠 뿐 실제 삶과는 무관함을 깨닫게 하는 대다수 국내 '판타지' 장르물과 <알사탕>이 보여주는 '보법'은 오롯이 대척점에 위치한다. 비현실적 수단으로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반대편의 숱한 '양판소'와 비교하면, <알사탕> 속 환상세계는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기 위한 용기와 의지가 발현되는 극적 순간을 초현실적 이미지로 풀이하는 데 방점을 찍기 때문에 일어나는 대비 효과다.
대체 그런 '마술적 사실주의'로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현실과 어떻게 다를까? 동동이 입안에 들어간 마법의 알사탕은 마치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 속에서 숱한 외계인과 소통을 해야 하는 주인공들의 통역기 노릇을 톡톡히 소화한다. 물론 만능은 아니다. 도시 속 일상의 판타지라는 명제에 충실하게 6개의 알사탕은 각각 하나의 대상과만 교감할 수 있다. 게다가 불량식품의 치명적 매력, 먹다 보면 금방 녹아서 사라지는 특성도 고스란히 갖췄다. 시간제한이 분명하고 한 번에 하나의 대상과만 소통할 수 있다. 이만큼 장르의 정석이 또 있으랴.
동동이는 알사탕 통역기로 상상도 하지 못한 상대와 차례로 대화한다. 집 거실에 언제부터 놓여 있던 낡은 소파, 이제 나이 들어 헥헥거리는 반려견, 늘 자신을 엄히 꾸짖는 아빠의 속마음, 이젠 보기 힘든 그리운 할머니가 차례로 등장해 동동이가 몰랐던 진실을 일깨워준다. 누구나 어릴 적 상실과 회한을 떠올릴 때, '지금 깨달은 걸 그때 알았더라면?' 탄식할 내용을 동동이는 마법의 알사탕 덕분에 적시에 극복할 찬스를 얻은 셈이다. 은근히 부러울 이가 적지 않을 법하다.
그리고 알사탕이 줄어들수록 소년의 기대와 관객의 궁금증이 더불어 증폭된다. 계속 하나씩 주인공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들이 채워지자, 은근히 부럽기도 하지만 과연 무얼 더 얻을까 질투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관객의 심보를 슬쩍 콕 꼬집듯 끝에 남은 사탕들의 효용 역시 일방적인 '계몽'과는 차원이 다른 '교훈'을 잔잔한 수면 위 파문처럼 던진다. 그렇게 소년에게 깃든 꿈 같은 판타지는 모범적인 성장동화로 대미를 장식한다. 궁금하면 확인하시라.
'K-콘텐츠'가 나아갈 길을 은근슬쩍 제시하는 작업
백희나 작가는 찰흙과 유사한 소재인 '스컬피'를 손수 빚어 제작한 인형을 사진으로 일일이 촬영해 동화를 만든다. 즉 원작 동화는 곧 평면으로 보는 '스톱 모션 클레이 퍼펫 애니메이션'이 되는 셈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장르 구성원칙에 정확히 부합된다. 그런 개성을 가진 원작을 영상화한다면 당연히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게 당연히 여겨질 테다.
하지만 이 방식의 문제는 극한의 수공예 작업이라는 점이다. 즉 엄청난 품과 시간, 비용이 투입되지만 정작 수익성은 반비례하는 방식이다. 아무리 성공적인 원작이라도 이러면 자본주의 문화산업에서 손익분기점 맞출 재간이 없다. 그래서 제작진은 원작자에게 포트폴리오 제출해가며 장기간 설득을 벌였다고 전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대로 원래 작품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정성 가득히 원작에 대한 존경을 담아 완성된 작업은 작가의 신용을 획득하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눈으로 확인하면 대부분 동의할 테다. 정 아쉽다면 공적 지원이건 펀딩 투자건 적극적으로 동참할 일이다.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은 국내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일본 제작사 토에이다, 만화왕국 일본의 수많은 원작을 제치고 한국 작가의 작업을 여러 장벽을 감수하며 작업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일본 제작진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백희나 작가가 선보인 동화 속 세계가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어디건 통할 보편적 이야기로 매력이 넘치기 때문에 택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굳이 일본 배경으로 각색하지 않고 서울의 실제 풍경을 최대한 고스란히 담고자 했음을 피력한다. <드래곤볼 Z>와 <소년탐정 긴전일>을 담당한 감독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만든 프로덕션이 선택한 작업이라면 괜히 신뢰감이 급상승하지 않는가.
상업성에만 매몰되었다면 줄거리를 억지로 추가해 텔레비전 시리즈로 양을 늘렸을 텐데, 오히려 정반대로 예술성을 높여 전 세계 영화제에 출품해 인지도를 쌓았다. 국내 첫 공개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고, 올해 미국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른 성과도 작은 파문을 불러오기 충분한 결실이다.
백희나 작가가 초기작 <구름빵> 관련 저작인격권 문제로 국내 출판업계의 무분별한 콘텐츠 가공에 반발한 것과 비교하면, 콘텐츠 원형의 존중과 최대한 작가 의도에 부합하는 2차 가공을 준수하는 일본 장인정신이 오히려 국내에 참고가 될법한 대목이다. 자꾸만 외형과 규모에 치중하며 초심을 잃고 개성이 탈각되는 콘텐츠 업계에 반성을 촉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알사탕>은 20분 조금 넘는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예전 같으면 극장 개봉이 불가능한 '사이즈'지만, 극장가 불황에 돌파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봉 형식으로 소개가 이뤄지게 되었다. 혹자는 복합상영관의 광고 노출 확대 창구라 비판하지만, 기존에 정형화된 장편 신작 위주가 아니라 재개봉-단편-기획전 등 새로운 경로 모색은 흥미롭게 관전할 지점이란 생각이다. 일단 <알사탕>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호사스럽고도 정겨운 체험이 될 것은 분명하다.
<작품정보>
알사탕
Magic Candies
2024|일본|애니메이션
2025.05.28. 개봉|20분 43초|전체관람가
감독 니시오 다이스케
PD 와시오 타카시
원작 백희나 작가, 『알사탕』, 『나는 개다』
제공 토에이 애니메이션
제작 토에이 애니메이션, 단델라이온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수입 엠라인디스트리뷰션㈜
배급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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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일단 한번 속는 셈 치고 보세요, 호사스러운 경험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