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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만'은 법원 공무원으로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해왔다. 일이 많아 가족과 자주 시간을 보내진 못해도 아내 '나즈메'와 두 딸 '레즈반', '사나'에겐 자상한 아빠다. 성실하지만, 어쩐 일인지 진급이 늦어 근심인데 마침내 판사 임용 직전인 '수사 판사' 승진이 찾아온다. 투덜거리던 딸들도 기대에 들뜬다. 여기까지는 만사형통이다.

이만은 새벽 출근해 밤늦게 혹은 새벽녘 퇴근이 일상이다. 나즈메는 고생하는 남편이 염려되지만, '판사 가족'이란 지위가 가져올 여유를 포기할 순 없다. 하지만 하필 꿈에 그리던 승진과 함께 곤란한 일이 연이어 터진다.

22살 젊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외출할 때 여성이 둘러야 할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도덕 경찰'에 체포된다. 연행 직후 갑작스레 그녀가 의문사하자 '히잡 혁명'으로 알려진 대규모 시위가 발발하고 전국에 불길처럼 번진다. 수사 판사인 이만의 주요 업무는 판결 전 조서 정리다. 강경 대응을 선언한 검경은 법원에 압력을 넣어 사실상 도장 찍는 기계를 요구하고, 하루 수백 명씩 조사하느라 신경은 곤두선다.

단순 시위가담자에게 사형을 포함한 중형이 철퇴처럼 내려지자, 이를 수행하는 법원 직원에 시위대의 분노가 집중된다. 법원에선 이만에게 호신용으로 총기를 지급한다. 총을 휴대하니 좀 안전한 기분이다. 시위에 골머리 아픈 아빠와 달리, 친구가 잡혀가고 SNS 통해 정부 뉴스가 은폐하는 시위의 진실을 본 딸들은 이만의 업무를 대충 알게 되자 거세게 반발한다. 어렵게 마련한 가족 회식에서 한바탕 언쟁이 벌어진 다음 날, 출근하려던 이만은 총이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가족 내에 균열과 불신이 밀려드는 건 시간문제다.

2022년 히잡 혁명을 자양분으로 탄생한 영화

이란은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 등과 '악의 축'으로 공공연히 지목되는 나라다. 흔히 중동이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데다 산유국이고, 대국 페르시아의 계승자라는 자부심도 상당하다. 게다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시아파 총본산으로 1979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근본주의 혁명을 이룬 후 이슬람 공화국, 즉 신정국가 체제를 수출하려 거듭 시도 중이다. 그러니 서방 진영에선 눈엣가시 취급을 받으며 40여 년째 경제제재를 당하는 처지다.

이란에 관한 시각은 상반될 수밖에 없다. 반미주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서구 세계가 지적하는 인권탄압 문제는 미디어를 이용한 선동이 상당 부분 덧입힌 것이라 간주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 패권에 맞선 다극 체제 구축을 모색하는 측면을 강조하며 러시아의 침략전쟁을 은근히 변호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맥락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단순 논리처럼, 초강대국 패권주의에 충돌하는 세력은 모두 아군이라 착시하는 맹점이다.

물론 국제정치학에서 간과해선 안 될 지점이자, 미국 입장에 과도하게 치우친 국내 미디어 편향도 따질 문제다. 그러나 한 국가 내에서 자국민의 보편적 권리와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여부만 놓고 보면 이란 현 체제가 결함이 많은 건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비판자들은 외부의 '적'이 호시탐탐 이란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니 한가하게 인권과 자유 운운할 겨를이 없다는 방어 논리를 현 체제가 전가의 보도로 써먹는다고 지적한다.

이만이 가족을 설득하기 위해 현재 체제가 개선할 점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온라인에 횡행하는 과잉진압 증거 영상이 조작이라 분개하며 적을 이롭게 하는 음모에 놀아난다고 딸들과 대치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하지만 2022년 9월, 마흐사 아미니 의문사로 촉발한 시위는 비밀 지도부가 외국 지령을 받거나 치밀한 사전 모의로 벌어진 게 아니다. 청년 세대와 여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불만과 항의가 동시다발로 틈새를 비집고 분출한 것뿐이다. 누군가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히잡 좀 착용하지 않고 외출하고 싶고, 누군가는 염색도 하고 매니큐어도 바르며 멋내고 싶다. 물론 시위대가 그런 너무나 사적 이유만으로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경제제재로 누적된 불황은 서민의 삶을 간신히 견디는 수준으로 추락시켰고, 겉으론 절대다수가 이슬람 신앙으로 뭉친 것 같아도 실제 다양한 종교와 소수민족 문제가 첩첩산중인 현주소가 드러난다. 펄펄 끓는 가마솥을 넘치지 않으려면 적절히 뚜껑을 열어야 하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강경파는 찍어누르면 된다고 강변하고, 반대파는 약간의 양보에 만족할 수 없어 더 많은 걸 요구한다. '개혁'은 어쩌면 '혁명'보다 더 고난도 행위다. 영화는 이란의 내밀한 실태를 평범한 중산층 공무원 가족 실내극을 통해 오롯이 해부하고 전시하는 위업을 이룩한다.

1987년 이전 한국과 기이할 만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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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나무의 씨앗>은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이란을 뒤흔든 히잡 혁명 전모와 배경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기록한 작업이다. 이란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꼭 봐야 할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평범한 중산층 가족의 내부 갈등과 붕괴로 형상화한 감독의 솜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찰나가 영화 내내 연달아 쏟아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반드시 이란의 현실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인가 물음표가 떠올랐다. 단순 대입할 순 없더라도, 배경과 시차를 적용하면 너무나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이전 군부독재 치하에서 경제성장이 본격화되고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한국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사건과 갈등이 연이어 벌어진다. 기이할 만큼 닮은 꼴이다.

이만은 대드는 딸들이 기막히다. 체제의 단물을 빨아 먹기만 한 철없는 세대가 신의 법과 기성세대 분투를 우습게 알고 타락한 서구 선동에 놀아난다고 말이다. 너희가 누리는 모든 것, (자신이 맨주먹으로 노력해 쌓은) 괜찮은 아파트와 자가용, 어려움 없는 중산층의 삶은 다 아빠가 마음 내키지 않고 주변에 제대로 알릴 수도 없는 희생과 수고로 얻은 것이란 항변이다. 나즈메는 초반 내내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는데, 아빠 정도면 훌륭한 가장이라며 남편을 옹호한다. 부부의 과거에 비하면 현재의 삶과 이란 체제는 충분히 견딜 만하고 좋아진 셈이다.

그러나 레즈반과 사나는 그런 부모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만하면 괜찮은 세상이란 어른들의 설교보다 또래 친구들, 우회 서비스되는 온라인 정보에 더 끌린다. 어느 나라나 청년 세대는 그런 법이다. 아빠가 매도하듯 적들의 작전에 놀아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매일 마주치는 시위의 구호는 고작 '지나(여성-삶-자유)'일 뿐이다. 누구나 원하고 더욱 보장돼야 할 당연하고 보편적 권리 요구다. 이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겨우 이런 내용 외치는데 총에 맞거나 구타 끝에 체포되면 가담만 해도 5년 형이 선고된다. 감독은 고도로 상징화한 은유로 시선 대비를 묘사한다. 레즈반의 친구가 시위 도중 산탄에 얼굴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응급조치를 받는 얼굴, 그리고 출근을 앞둔 수사 판사 이만이 몸단장을 공들여 받는 얼굴을 클로즈업한 대비가 그렇다. 얼굴에 수북히 박혔던 쇠 구슬과 피고름 대 수염과 털을 말끔하게 걷어낸 반드르르한 피부는 이란 체제가 감추고픈 진실과 내세우는 강국 위신의 극명한 비교다.

그런 타협할 수 없는 갈등은 박정희-전두환 시절 중산층 자녀들이 민주화에 투신하고,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한 일본과 서구 청년 세대가 68혁명에 나선 이유와 다를 바가 없다. 기성세대는 자식들이 배은망덕하고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혀를 차지만, 정작 자신들이 원했던 꿈과 기대를 잊어먹은 지 오래다. 세상은 고정된 게 아니라 계속 갈등과 충돌 속에 변화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망실해 버렸다. 그 빈 자리를 기득권 가부장 권위로 찍어누르려 할 따름이다.

'총'과 '대화'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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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란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 동서양 초월해 민주화 과정에서 겪는 세대 갈등을 영화는 가족 드라마·심리 스릴러로 압축해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축약이나 단순화라는 편리한 방법을 쓰는 대신에 기가 막힐 만큼 은유와 상징 장치를 구사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서사를 완성한다. 정말 끝까지 이 영화가 어디로 달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마 관객은 영화 속 가족 내 구도처럼 현실 자신이 어떤 입지에 속했는가에 따라 감정 이입이 달라질 듯하다. 물론 후반부에 폭주하듯 휘몰아치는 인물들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면 양비론으로 그칠 순 없다. 언뜻 잔인하게 여겨질 자식 세대의 반항은 그보다 더 극단적인 기성 세대의 감췄던 폭력성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업과는 또 다른 각도로 놀랍도록 '가족'을 통해 세계의 대립을 드러내는 위업이다.

감독은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인도양의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불교를 비롯해 여러 종교의 성수로 대접받는 '인도보리수' 일화를 도입부에 소개한다.

"이 나무의 씨앗은 새의 배설물에 섞여 다른 나뭇가지 위에 떨어지고, 거기서 발아합니다. 그 후 뿌리가 땅을 향해 자라나고, 땅에 닿으면 인도보리수는 마침내 스스로 서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뿌리로 숙주 나무를 서서히 감아 올라가며 결국 그 나무를 질식시킵니다."

처음 볼 땐 뜬금없는 데다 잔혹해 보이는 일화를 영화가 끝나고 곰곰이 되새겨본다. 이 가족의 숨 막히는 대립과 갈등이 이미 도입부에서 다 해설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전율하고 만다. 마치 어릴 적 읽던 고전 추리소설 속 명탐정과 독자의 두뇌 대결에서 실은 모든 증거와 단서를 미리 제시했는데도 감조차 잡지 못했던 열패감을 재현하는 기분이다. 그만큼 그저 정치적 화두나 민감한 소재에만 기대지 않고도, 히잡 혁명과 조국 이란에 관한 장대하고도 가슴 아픈 연대기를 평범한 가족의 며칠 동안 벌어진 일상으로 구현해내고야 말았다.

[작품정보]

신성한 나무의 씨앗
The Seed of the Sacred Fig
2024｜이란/프랑스/독일｜드라마/스릴러
2025.06.03. 개봉｜167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모함마드 라술로프
출연 미사그 자레, 소헤일라 골레스타니,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2024 7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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