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3회 광주독립영화제 폐막식에서 폐막작을 설명하고 있는 오태승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2024년 13회 광주독립영화제 폐막식에서 폐막작을 설명하고 있는 오태승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광주독립영화제 제공

"전체 예산이 30% 줄어들면서 스태프 수를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시청에서 지원은 동결이고 영화진흥위원회 예산을 못 받다 보니 어려움이 큽니다."

오태승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는 올해 영화제를 예년보다 줄여서 할 수밖에 없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오는 6월 26일 개막을 준비하고 있는 광주독립영화제는 지역영화 성장이 돋보이는 상징적인 독립영화제로 꼽힌다. 광주 전남지역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70%에 달할 만큼 지역 창작자들에게 동기 부여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에 변변한 영화전공 학과가 없는 현실에서 지역영화 활성화를 견인하는 중이다.

영화제 예산 축소와 함께 사라진 지역영화 관련 예산 삭감도 광주의 영화창작 활동에 근심을 드리우는 요소다. 충무로 중심의 한국영화에서 지역에서의 창작 활성화를 위해 장기적 안목으로 지원이 이어졌으나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윤석열 정권은 12억 정도의 예산을 아예 없애버렸다.

예산 압박은 규모가 큰 영화제도 다를 바 없다. 7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급 흥행을 기록한 전주영화제는 행사를 목전에 두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지원 예산이 1억 5천만 원이나 줄어들면서 당혹해야 했고, 7월 초 개막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역시 영진위 지원이 소폭 늘었다고는 하나 예년에 비하면 턱없는 수준이다. 윗돌 빼내 아랫돌 괴는 식으로 영진위의 지원이 조삼모사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예전 지원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

원인은 윤석열 정권 등장하면서 영진위의 관련 사업 예산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 예산 삭감은 지원대상의 축소로 이어졌다. 이전 50억 안팎의 예산을 40여 개 영화제에 지원하던 게 절반 아래로 떨어지면서 볼 멘 소리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영화계의 의견을 무시한 정부의 일방적 결정이 초래한 결과였다.

정권마다 유독 차이, 블랙리스트 작동한 결과

 2024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2024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서울독립영화제 제공

사실 영화제 지원사업은 정권마다 유독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다. 한국영화산업에 친화적이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국고를 통해 꾸준히 지원을 늘려갔다면, 반대로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에서는 국고지원 대신 영화발전기금 사용으로 변경하거나 이마저도 계속 줄여나갔다.

정치적 판단에 따른 '블랙리스트'가 작동한 결과였다. 이명박 정권 당시 영화제를 좌파들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청산대상으로 삼았던 게 시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어렵게 만들어 놓은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는 정권이 바뀌자 심사 부정 논란까지 불거지며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나중에 영화계가 힘을 모아 되살려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으나, 윤석열 정권의 등장으로 박근혜 정권보다 더 못한 수준으로 후퇴했다. 민주적인 정부에서 예산을 늘리면 보수 정권에서 줄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사라진 서울독립영화제 예산은 이전 보수정권 때보다 더 악화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영진위가 공동주최자로서 의무적으로 편성하던 예산을 갑작스럽게 없앤 것에 정당한 명분은 없었다. 논란이 커지자 영진위는 '(기존 서울독립영화제에 배정하던 예산을) 국내 영화제 지원사업에 편성했으니 서울독립영화제도 공모에 응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서울독립영화제는 올해 영화제 지원사업 공모에 지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항의했다.

현재의 영진위가 1974년 영화진흥공사로 출범하고 이듬해 한국청소년영화제란 이름으로 만든 서울독립영화제는 영진위의 존재감을 알린 대표적 사업 중 하나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공동주최자로 참여해 2001년부터 서울독립영화제로 명칭을 변경해 5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 성장한 감독으로는 내란을 막은 영화로 평가되는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임순례 감독, <베테랑> <밀수> 류승완 감독, <기생충> 봉준호 감독, <곡성> 나홍진 감독, <부산행> 연상호 감독, <낮은 목소리> <화차>의 변영주 감독 등이 대표적인다. 넷플릭스 < D.P > 한준희 감독,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 <도희야> 정주리 감독, <벌새> 김보라 감독 등도 서울독립영화제를 발판으로 성장했다.

상식적이라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는 영화제를 더 키우는 게 당연하겠지만 보수 정권은 온갖 핑계를 대며 영화제 예산 줄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의 해방구로서 영화제의 역할이 불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때 2014년 세월호 다큐 상영을 문제 삼아 부산영화제에 정치적인 탄압을 가했고, 윤석열 정권 때 문재인 대통령 소재 다큐멘터리를 문제 삼아 전주영화제를 비판한 보수정당의 태도는 영화제에 대한 이들의 관점을 엿보게 한다.

한국영화 성장 방해하는 블랙리스트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의 잇따른 등장은 2000년대 한국영화 급성장에 일조했다.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영화가 해외에 소개돼 인정받으면서 국내 영화제들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K-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한국영화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영화 강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영화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한국영화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는 블랙리스트다. 지난 23일 서교동에서 열린 '21대 대통령선거 문화정책 대전환을 위한 토론회'에서 이하영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운영위원은 한국영화가 블랙리스트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검열부터 시작해 심사에서 배제당하기까지 하고, 작품과 영화인들의 타격도 컸다"고 말했다. 특히 "지원에서 문제가 생겼고, 독립영화·지역영화·영화제·성평등 교육·서울독립영화제 예산이 삭감되면서 이런 부분까지 통제가 돼 안 좋게 됐다"면서 "이 상황에서 회복이 가능할까? 라는 고민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블랙리스트 논란을 겪은 후 등장한 윤석열 정권은 줄곧 블랙리스트를 부인해왔으나,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는 생각이 달랐다.

 지난 5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대토론회
지난 5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대토론회성하훈

지난 5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대토론회'에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송경동 시인은 "윤석열 정부는 내란 이전부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표적으로 나섰다"고 주장했다.

근거로 이명박 정부 시절 화이트리스트 육성 등의 블랙리스트 실행 당시 최장수 문체부 장관과 대통령 문화특보로 일하다 다시 장관을 맡은 유인촌 문체부 장관과 박근혜 블랙리스트 당시 선임행정관으로 블랙리스트에 관여했던 용호성 현 문체부 1차관을 지목했다.

구체적으로 집권 직후인 2022년 5월 5.18 거리미술전에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이 걸리자 보조금 지원사업 취지에 어긋난다며 후원을 취소한 것을 비롯해,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공식상영작인 <금정굴 이야기> 방영 불가,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윤석열차' 예술 검열 사건, 영진위가 차세대 미래 관객 육성사업에서 특정 사상 이념의 배제를 요구하며 검열 통제를 한 사안 등 수십 개 사례를 제시했다.

따라서 영화계는 한국영화 성장을 방해하는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근원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보수정권 때마다 등장하는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서는 새정부에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8일 국회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온 강신하 변호사는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한 위원회'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부나 산하기관이 정부 정책비판 내지 정치적 성향 등을 이유로 문화예술인을 차별할 경우 위원회에 시정조치 권한과 벌금 및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는 제재 조치를 강화하고 형사고발권도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반헌법적 국가범죄는 시효가 없다"며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특별법 제정은 필수이고 피해자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를 정지하고 가해자의 관여를 배제한 독립적 기구에 의해, 재발 조처가 이뤄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영화제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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