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사극에서는 <허준>과 <대장금>,<주몽>,<이산>,<동이>,<태조 왕건>,<태양인 이제마>,<대조영>처럼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을 드라마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시대에 맞게 많은 각색이 이뤄지지만 역사 속 인물이 제목으로 붙은 드라마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부담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해당 배우의 연기가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실제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이기가 더욱 부담스럽다. 따라서 드라마 제목과 캐릭터 이름을 변경해 드라마를 만드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1990년에 방송된 <야망의 세월>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건설사 대표 시절을 모티브로 만든 <야망의 세월>은 훗날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부장관을 역임한 유인촌 장관이 이 전 대통령에 해당하는 캐릭터 박형섭을 연기했다.

지난 1999년 가을에 방송돼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드라마 역시 5~6명의 직원을 둔 작은 제과점을 유명 제과 기업으로 성장 시킨 한 기업인을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다. 특히 이 드라마는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면서 척박하던 시절 여성 기업인의 성장 서사를 잘 보여줬다. 김혜수가 드라마 제목과 같은 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했던 MBC 월화드라마 <국희>였다.

 <국희>는 1999년 가을에 방송돼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국희>는 1999년 가을에 방송돼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국희> 홈페이지

자신만의 확실한 아우라를 가진 배우

중학생 시절 CF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김혜수는 1986년 영화 <깜보>에서 밤무대 소녀 가수를 연기하며 연기를 시작했고 가요 역사상 최초의 뮤직비디오인 '가왕' 조용필의 <허공>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김혜수는 드라마 <세노야>,<순심이>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인지도를 올렸고 20대가 된 후에는 1993년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을 통해 청룡영화상에서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한 김혜수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일요 아침드라마 <짝>에 출연하며 1996년 MBC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1998년 SBS의 정치드라마 <삼김시대>와 1999년 노희경 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 출연하며 연기 영역을 넓힌 김혜수는 같은 해 가을 MBC 월화드라마 <국희>에서 제과기업 C사의 창업주를 모델로 한 민국희 역을 맡았다.

<국희>에서 어떤 어려운 역경과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추진력 있는 캐릭터를 맡아 열연을 펼친 김혜수는 <국희>를 50%가 넘는 시청률로 이끌며 1999년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김혜수는 2000년대에도 영화 <신라의 달밤>과 드라마 <장희빈>에 출연하며 최고의 스타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2006년엔 영화 <타짜>에서 정마담을 연기하며 독보적인 아우라를 뽐냈다.

흔히 어릴 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여성 배우들은 대중들에게 익숙해지면서 전성기가 빠르게 저무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김혜수는 그녀만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전성기를 계속 이어갔다. 김혜수는 2012년 <도둑들>의 펩시 역으로 천만 배우에 등극했고 2013년 <관상>도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13년에는 <직장의 신>에서 만능 계약직을 연기하며 2013년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5년 영화 <차이나 타운>과 2016년 <굿바이 싱글>에 출연한 김혜수는 같은 해 드라마 <시그널>을 통해 1996년 <곰탕> 이후 20년 만에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혜수는 2020년대에도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과 tvN 드라마 <슈룹>에 출연했고 2023년에는 영화 <밀수>를 흥행 시켰다. 김혜수는 올해도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트리거>에 출연해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였다.

여성 성장 드라마의 원조

 김혜수는 <국희>를 통해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는 '원톱 여성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김혜수는 <국희>를 통해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는 '원톱 여성배우'로 자리매김했다.MBC 화면 캡처

2000년대 초반을 강타했던 <대장금>과 지난 5일 백상예술대상에서 김태리에게 TV부문 여우주연상을 안긴 <정년이>는 여성의 성장 서사를 다룬 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대장금>과 <정년이>로 대표 되는 여성 성장 드라마의 원조는 따로 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하녀처럼 성장하다가 상경 후 제과점에서 일을 시작해 작은 제과점을 기업으로 성장 시키는 드라마 <국희>다.

새 천년을 앞둔 1999년은 MBC 월화드라마의 전성기였다.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차인표의 대표작이 된 <왕초>가 인기리에 방송됐고 9월에 방송을 시작한 김혜수의 <국희> 역시 50%가 넘는 시청률로 20세기의 마지막 가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리고 <국희>가 종영한 후에는 대한민국 역대 사극 최고 시청률(64.8%)을 기록한 전설의 드라마 <허준>이 1900년대의 끝과 2000년대의 시작을 지배했다.

<국희>는 정성희 작가가 C제과 창업주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드라마로 C제과로부터 후원을 받아 제작됐다. 특히 극 중에서 국희와 태화당 식구들이 개발한 국내 최초의 땅콩샌드 '동그라미'는 1961년에 출시된 C제과의 대표 과자와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C제과에서는 <국희> 방영시기에 맞춰 '국희 땅콩샌드'라는 샌드 과자를 출시해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꾸준히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 <국희>는 주인공 국희가 작은 제과점을 번듯한 제과 전문기업으로 육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하지만 일제시대부터 1950년대가 주요 배경인 만큼 절친이었던 독립 운동가와 친일파의 배신과 음모가 다뤄지고 국희와 송신영(정선경 분), 최민권(손창민 분), 김상훈(정웅인 분)의 '사각 러브라인'도 꽤 비중 있게 그려진다. <국희>가 남녀 시청자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답게 <국희>에서 선역 캐릭터를 맡았던 배우들이 훗날 다른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변신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국희 역의 김혜수는 3년 후 '희대의 악녀' 장희빈이 됐고 독립운동가 출신 경무대 비서관 최민권 역의 손창민도 <마의>에서 악역 이명환을 연기했다. 국희에 대한 순애보를 보인 김상훈 역의 정웅인 역시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됐다.

넓은 연기 스팩트럼 과시한 배우 박영규

 그 시절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엔 SBS와 MBC에서 배우 박영규의 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엔 SBS와 MBC에서 배우 박영규의 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MBC 화면 캡처

중후한 이미지의 멋쟁이 신사 이미지가 강했던 박영규는 1997년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미달이 아빠를 연기하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렇게 '미달이 아빠'의 코믹한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준 박영규는 <국희>에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노리고 친구를 살인교사하는 송주태 역을 맡아 또 한번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만큼 박영규는 <국희>를 통해 넓은 연기 스팩트럼을 과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들만의 세상>,<지상만가>,<3인조>로 이어지는 영화 3편이 연달아 흥행 참패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듯 했던 정선경은 <국희>에서 서브 주인공 송신영을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 신영은 어린 시절 국희에게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성인으로 성장한 후 국희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최민권을 짝사랑해 국희와 삼각관계가 됐지만 심성이 착해 악녀로 돌변하지도 않았다.

정선경이 연기한 신영이 국희와 최민권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했다면 신예 시절의 정웅인이 맡은 김상훈은 국희와 최민권 사이에서 또 다른 삼각관계를 만들었다. 김상훈은 냉혹한 사채업자로 성장해 본의 아니게 국희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결국 국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당시 일부 시청자들은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김상훈에게 모질게 대하는 국희에게 원망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스터디그룹>에 출연하며 현역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전무송 배우는 <국희>에서 국희가 처음 일하게 되는 태화당의 장태화 사장을 연기했다. 국희에게는 아버지이자 인생의 스승 같은 존재로 국희에게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알려준 인물이다. 실제로 국희는 태화당과 자신이 위기와 시련에 빠질 때마다 장태화 사장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드라마보는아재 국희 김혜수 정선경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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