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외연과 내실, 양과 질 모두에서 높이 평가한다. 영화제 기간 전주를 찾은 관객수부터 예매 및 좌석점유율, 부대행사의 수, 공모에 참여한 작품의 수와 공식 초청돼 상영된 작품의 수가 전자를 이룬다면, 그 반대편엔 영화제를 찾은 관객의 만족도며 초청작의 수준과 가치 따위가 자리할 테다. 나는 양쪽 모두에서 이번 영화제가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성취를 얻었다고 여긴다. ·
초청된 작품이 받는 평가는 영화제의 격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서 들여온 해외 작품 가운데선 세계 영화계 동향에 빠삭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받는 화제작이 적잖았다. 개중에서도 이번 영화제의 격을 올린 단 한 편을 꼽으라 한다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임 스틸 히어'라고.
'아임 스틸 히어', 직역하자면 '나는 여전히 이곳에' 쯤이 될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는 이름을 달리 하여 상영했다. 한국사회의 오늘을 곧장 떠올리게 하는 <계엄령의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제를 찾은 소위 씨네필, 영화 깨나 본다는 이들의 기대작 리스트에서 이 영화는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건 이 영화가 통상적으로 전주국제영화제가 가져오던 영화의 체급에서 벗어나 있는 때문이고, 유력 영화정보 사이트에서 다른 기대작을 크게 상회하는 평점을 받고 있었던 때문이다. 이를테면 올해 월드시네마 섹션 초청작 25편 가운데서 'IMDb' 기준 평점이 8.0을 넘는 건 <계엄령의 기억>(8.3)이 유일하다. 영화평론 사이트 '메타크리틱'의 메타스코어도 85점으로 상당한 고점이다. 다른 초청작이 못하단 뜻이 아니다. <계엄령의 기억>이 체급이 다르단 이야기다.
이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는 건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선명하게 다가설 테다.
▲계엄령의 기억스틸컷
JIFF
26회 JIFF 최대 기대작, 뚜껑 열었더니
상당한 경쟁을 뚫고 영화제 기간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단 건 행운이라 하겠다. 영화제를 찾은 많은 이들이 이 영화 관람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나는 운이 좋았고, 이 영화를 '계엄령의 기억'이란 시의적절하면서도 온당치 않은 제목으로 관람한 몇 안 되는 관객이 될 수 있었다.
영화는 1970년대 브라질의 한 가정을 비춘다. 전직 국회의원 루벤스 파이바의 가족으로, 그는 아내인 에우니시 파이바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둔 중년의 가장이다. 건축가이기도 한 루벤스는 정계에서 사실상 밀려난 뒤에도 브라질리아의 저택에서 가족들에게 유복한 삶을 선사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인물이다. 금슬 좋은 부부와 건강한 아이들, 헌신적인 가정부까지, 파이바 가족에게 부러울 건 세상 무엇도 없는 듯 보였다.
<계엄령의 기억>은 파이바 가족의 행복한 한 때를 아름답게 그리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리우 데 자네이루의 바다와 해변, 아이들이 북적이는 집이며 활기 넘치는 거리까지가 하나하나 찬란하다. 이로써 기대하는 효과는 분명하다. 파이바 가족의 행복이 커질수록 그것이 깨질 때의 충격 또한 강렬하다.
▲계엄령의 기억스틸컷
JIFF
한국 현대사와 데칼코마니, 브라질의 독재
바우테르 살리스는 브라질 영화계가 낳은 걸출한 재목이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와 함께 세계적 명성을 얻은 몇 안 되는 이름으로, <계엄령의 기억>은 그가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으로 대단한 기대를 받았다. 마르셀루 루벤스 파이바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파이바 일가의 이야기는 브라질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군부독재와 그에 굴하지 않은 한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말하는 작품으로,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위협받는 오늘의 정치상황 가운데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상당한 노력을 들여 <계엄령의 기억>을 초청한 데는 이 작품이 다루는 브라질의 지난 역사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테다. 브라질 현대사는 남미 여러 국가가 그러하듯, 여러모로 한국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1964년 미국의 노골적 지원 아래 브라질의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다. 군부의 수장 격이던 그는 20년을 지탱하던 제4공화국을 깨뜨리고 제도법령을 발표하며 반대파를 숙청, 군부독재를 공고히 한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여년 이어진 군부독재로부터 박정희와 전두환을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통점은 이뿐이 아니다. 브라질 제38대 대통령 자이르 메시아스 보우소나르가 재선에 실패한 뒤 불복하여 부정선거 루머를 유포하는 등 2023년 1월 브라질리아 폭동을 선동한 건 또 하나의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하다. 심지어 후일 법무장관 안데르송 토히스의 집에서 계엄령 시나리오 문건이 발견돼 그가 계엄령을 진지하게 검토했단 사실이 공개되기까지 했으니 브라질의 상황과 한국의 오늘을 겹쳐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임 스틸 히어'를 '계엄령의 기억'으로 무리하게 개명하면서까지 한국에 소개하려 했던 전주국제영화제의 의도 또한 여기에 있을 테다.
▲계엄령의 기억스틸컷
JIFF
원제 버리고 택한 의역, 다소 아쉬워
이 영화를 두고 올해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초청된 <목인>의 이명륜 감독에게 연출자가 갖는 시각은 어떤지 물었다.
이명륜 감독은 "영화는 브라질에서 어떤 연유로 계엄령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영화의 시점이 어떤 정치적, 역사적 상황인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서, 그 역사의 길 한복판에 놓여있는 가족들의 감정에 집중한다"며 "전체적인 흐름을 끌고 가는 인물은 엄마 에우니시 파이바로, 아빠 루벤스 파이바가 군 기관에 체포돼 실종된 뒤 무너져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어린아이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서 "엄마가 혼자 강인하게 버텨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슬픔과 고통이 전가되는데,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한 인물이 아닌 가정 전체가 무너져 간다는 걸 피부로 몸소 느끼고 씁쓸함과 슬픔의 감정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흥미로운 건 이들이 아빠의 부재와 함께 자신들이 살았던 행복한 집을 벗어나 상파울루로 이사 가는 부분인데, 자신들이 살았던 집과 해변을 떠나는 이들의 눈빛에는 도망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뿐더러 실제로도 이후의 시간을 강인하게 버텨내고 새로운 대가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면서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이 더 단단하고 올곧게 보인단 점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명륜 감독은 영화제가 제목을 의역한 점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감히 예상해 보자면 이미 세상에 사라진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져 온다는 의미에서, 또 그들의 강인했던 영이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다는 의미에서 제목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싶다"며 "원제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의역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영화가 끝나고 제목을 곱씹으며 한국 관객들도 개인만의 감상을 더할 수 있는 좋은 제목이라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러모로 <계엄령의 기억>은 민주주의와 그 적, 나아가 위협받는 공화정의 오늘로부터 구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원제인 '아임 스틸 히어', 그 모든 압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는 영화의 외침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 하였던가. 끝끝내 비켜서지 않고 민주주의와 공화정, 시민사회와 나의 세계를 지탱하려는 시민들의 수고로움이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군부독재·계엄 모의... 한국이랑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