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봉수. 이제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사실 많이 늦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전주국제영화제는 꼭 10년 전인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장편 데뷔작에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안기지 않았던가. 박찬욱과 봉준호를 칸영화제가 낳은 거장이라 한다면, 전주국제영화제는 고봉수 같은 감독들을 낳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봉수는 지난 10년간 8편에 이르는 장편영화를 감독하며 작품활동을 활발히 이어왔다. 데뷔작 <델타 보이즈>부터 <튼튼이의 모험>·<다영씨>·<갈까부다>·<우리마을>·<근본주의자>·<습도 다소 높음>·<빚가리> 등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군은 저만의 색깔을 여실히 발하며 새로운 작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영화팬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한국 독립영화가 늘 그렇듯이, 흥행성적은 그와는 딴판이었다.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제작까지는 어찌어찌 해냈으나 멀티플렉스에서 널리 배급하고 마케팅을 하는 데는 애를 먹기 때문이다. 잘해야 4000여명, 때로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은 흥행이란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하다.
▲귤레귤레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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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디 귀한 감독 고!봉!수!
그럼에도 감독 고봉수의 존재는 한국영화계엔 귀하기 짝이 없다. 근래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일본영화계 젊은 감독들에 비하여, 한국 영화의 미래를 지탱할 젊은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감독 층이 빈약하기 짝이 없단 건 이젠 비밀일 수 없다. 지난달 내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한국영화 위기설을 논하는 질문에 "새로운 감독이 등장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짚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6년생인 고봉수가 아주 젊은 감독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올해로 49살, 곧 쉰을 바라보는 중견감독의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한국 영화계의 중추를 이루는 21세기 초 등장한 일군의 감독들에 비하여 그 작품세계가 한국 영화팬, 나아가 관객 일반에게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신선한 작가란 점은 언급할 만하다. 또한 그가 내놓은 작품들의 면면을 보자면 하나하나가 새롭고 독자적인 색깔을 갖추고 있어 한국영화판에선 귀하디귀한 존재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공식 초청된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전주가 발굴한 중견의 감독이 비경쟁 부문 장편으로 또 한 번 전주로 돌아왔단 점에서 그 발전과 변화에 주목하는 기민한 관객들의 관심을 모았다. <귤레귤레>는 고봉수의 작품 가운데서도 여러모로 특징적이다.
▲귤레귤레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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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모아 찬사를 뱉는 '귤레귤레'
우선 작품 전체가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등 해외 올 로케이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주연 가운데선 한국에서 모르는 이 얼마 되지 않는 명배우 이희준이 눈길을 끈다. 제작기간 15일, 제작비 250만 원의 초저예산 작품 <델타 보이즈>로 데뷔했을 적의 고봉수 감독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괄목상대, 천지개벽할 변화가 아닌가 말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모두 네 차례 상영된 <귤레귤레>는 본 이들이 입을 모아 호평을 내어놓는 인기작으로 자리했다. 모르긴 몰라도 고봉수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관객에겐 뚜렷한 족적을 새길 만큼 존재감 있는 작품이 됐을 테다. 코미디와 로맨스, 두 장르 사이를 기발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통상의 로맨틱 코미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국 낯선 공간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모여든 한국인 관광객들 무리 가운데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치 한편의 소동극처럼 꾸려간다.
이대식(이희준 분)은 회사 직속 상사인 팀장 고원찬(정춘 분)과 함께 튀르키예에 출장을 와 있다. 성실하지만 소심한 대식과 달리 팀장은 오지랖 넓고 나대는 인물이다. 악의는 없지만 제 입장에서만 행동하는 탓에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일쑤다. 출장을 마치고 관광을 좀 더 하자는 원찬의 강요 섞인 제안에 꼼짝없이 튀르키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대식이다. 그저 여행이 아니라 저 유명한 카파도키아 열기구 체험을 포함한 패키지 관광까지 끊었으니 어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대식의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귤레귤레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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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와 로맨스 사이
패키지 여행에 참여한 또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이 있다. 이정화(서예화 분)와 나병선(신민재 분)도 그중 하나다. 부부 사이인 듯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인데, 온갖 이유로 부딪치는 모습이 곁에서 보기에 살벌하기 그지없다. 특히 병선이 술을 마시는 걸 정화가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병선이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셔 다투는 모습을 상당히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대식과 원찬, 정화와 병선, 또 다른 패키지 관광객과 가이드까지를 등장시켜 도무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들의 여정을 재치 있게 이끌어간다. 코미디의 본질은 보는 이의 예상을 깨는 데 있다는 듯, 사소한 무엇 하나도 관객의 예상이며 기대처럼 흘러가게 놓아두지 않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다. 최적의 선택이며 일반적인 수법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 엉망진창처럼 보이지만 어찌어찌 이어가는 과정이 대체로는 유쾌하며, 때때로는 폭소까지 터뜨리게 한다. 이따금 배치된 의표를 찌르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귤레귤레>가 상당한 수준의 코미디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귤레귤레>는 그저 코미디에 그치지 않는다. 대식과 정화의 관계가 전면에 드러나며 작품은 좀처럼 마주할 수 없는 황당하지만 눈길을 뗄 수 없는 로맨스로 화하는 것이다. 그저 소동극을 넘어서 순간순간의 진솔한 드라마를 가진 탓으로, 누군가는 이 영화를 인상적인 로맨스 영화라 기억할 수도 있을 테다. 이희준이란 실력 있는 배우의 존재는 코미디와 로맨스를 오가는 와중에서도 영화가 중심을 잃지 않게끔 한다. 앞서 <습도 다소 높음>에서 함께한 바 있는 고봉수 감독과 이희준 배우의 합이 한층 발전한 듯한 인상이다. 이희준 뿐 아니라 서예화와 신민재, 정춘, 김수진, 박은영 등도 개성 있는 연기를 펼쳐 관객에게 제 존재를 각인시킨다.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건 영화제 기간 함께 자리했던 배우 이종윤이다. 그는 한국단편경쟁 공식 초청작인 <엔진의 심폐소생>의 배우로 이번 영화제를 찾았다. 이종윤은 "홍상수 감독 초기 영화처럼 상황만 주어지고 즉흥으로 연기하는 듯한 부분이 많아 보였다"며 "감독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과의 앙상블이 단연 돋보였다. 예상치 못한 방식의 로맨스가 죽어있던 연애세포의 허를 찌른다"면서 웃어 보였다. 요컨대 보는 이에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품도록 하는 작품이란 뜻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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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한국영화에 신선한 감독 없다고? '고봉수'가 보여준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