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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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을 살아보니, 인생이란 별거 아니더라. 아무리 잘났든 못났든 결국엔 팔십이 오고, 죽음이 온다. 그러니 끝내는 '건강한 사람'이 가장 잘난 사람이다. 열심히 살았고 내 몸을 아껴준 사람이 구십이 돼도 '파이팅' 할 수 있더라. 그리고 떠날 땐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고, '오늘이 내 끝이야. 내일은 못 봐, 알지?' 하고 가야 한다. 옆도 위도 보지 않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게 진짜 1등이다."
지난 21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아래 <유퀴즈>)에는 팔순의 나이에 유쾌한 '행복 전도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원로배우 선우용여가 출연했다.
"눈을 치켜뜨면 안 보이고, 너무 밑을 봐도 안 보인다"
선우용여는 대표작 SBS <순풍산부인과>를 통해 대한민국 레전드 시트콤의 대모로 활약한 배우다. 어느덧 팔순이 된 지금은 최고령 유튜버로 변신해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퀴즈> 출연 섭외를 받고는 "왜 이제야 불렀어?"라며 농담을 던졌다는 선우용여는 "역시 사람은 뜨고 봐야 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최근 온라인에서 받는 뜨거운 인기와 관심에 대해서는 "유튜브에서 떴다고 해서 크게 자랑스럽거나 하진 않다. 애초에 결혼하면서부터 TV 출연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오전 6시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호텔 조식을 먹으러 다니는 우아한 일상을 공개하기도 한 그는, 업로드 한 달 만에 출연 영상들이 모두 100만 뷰를 넘기며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오를 만큼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상을 본 많은 누리꾼들은 "선우용여처럼 당당하고 재미있게 나이 들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뇌경색이 오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 전까진 비타민 한 알도 안 먹었고,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순풍산부인과>가 그렇게 인기 있는 줄도 몰랐다. 계속 일만 하다가 뇌경색을 겪고 나서야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선우용여는 아침마다 혼잣말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외출할 때는 "잘 다녀오겠다"며 집에 인사도 한다고. 그는 "혼잣말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좋은 말을 자꾸 해줘야 한다. 내가 내 몸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며 자신의 건강 비결을 전했다.
한때는 일에 매달리느라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다는 그는 돈에 대해서도 "필요할 때 쓸 만큼만 있으면 된다"는 깨달음을 전했다. 어머니로부터는 "눈을 치켜뜨면 안 보이고, 너무 밑을 봐도 안 보인다", "남의 것 보지 말고, 네가 사는 것만 봐라", "조금 손해 본다는 마음으로 살라"는 인생의 지혜들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사람은 각자의 그릇대로 살면 된다. 그릇이 작은데 아옹다옹하다 보면 넘쳐서 속상해진다." 그는 그렇게 분수에 맞는 삶을 강조했다. '왜 잘 살고 싶냐'는 질문엔 "아프지 않으려고 잘 사는 거다. 내가 아프면 자식들에게 빚이 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국에서 진짜 연기 공부를 했다"
▲tvN<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화면tvN
젊은 시절 한때 발레리나를 꿈꿨던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무용가의 길을 접은 뒤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1965년 TBC 무용수 1기로 합격하며 연예계에 입문했고, 당시 지도교수는 "무용수로 지원해도 결국 드라마를 하게 될 것"이라며 오디션 출전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심사위원이었던 이병철 삼성 회장에 의해 당당히 1등으로 발탁됐다.
또 그는 '연예계 최초의 혼전 임신'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배우로 한창 활동 중이던 그는 팔남매의 장남이던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23세에 결혼했다. "그때는 임신하면 바로 결혼이었다. 돌이켜봐도 잘한 것"라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결혼은 예기치 못한 시련을 가져왔다. 남편이 지인의 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됐고, 결국 결혼식 당일 경찰에 체포돼 식장에도 나타나지 못했다. 당시 그는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보증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그 순간부터 빚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1960년대 기준 1750만 원은 현재 가치로 약 200억 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다. 본인이 지지 않은 빚을 떠안아야 했던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전생의 빚이겠거니 했다. 그때부터 'TV에 나오는 건 내 직업이고, 나는 배우도 스타도 아니다. 들어오는 작품은 다 하겠다'고 다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다작 활동을 이어갔다. 1979년엔 한 해에 무려 8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5일간 잠도 못 자며 밤낮 없이 촬영했고, 딸을 낳고 3개월 만에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촬영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바쳐 겨우 빚을 청산했다.
빚을 갚은 직후인 1982년, 그는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이번엔 '엄마'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낯선 미국에서 그는 봉제공장, 한식당, 미용사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89년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로 긴 공백을 깨고 배우로 복귀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던 그는 연출자 황은진 PD의 제안으로 귀국했고 "미국에서 연기를 더 많이 배웠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결혼 전엔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두 가지밖에 몰랐다.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세상을 몰랐다. 근데 미국에서 식당을 하면서 많은 캐릭터를 보며 공부했다. 사람들마다 웃음도 눈물도 다 다르더라. 결국 연기란 그런 보통 사람들의 모습 아닌가. 나는 미국에서 진짜 연기 공부를 한 셈이다. 한국 돌아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다."
재미있게 사세요
<순풍산부인과>는 선우용여를 '시트콤 대모'로 우뚝 서게 한 대표작이다. 그는 네 아이의 엄마이자 자신의 실명 그대로인 '용여' 역을 맡아,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연기로 수많은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정작 그는 당시 바쁜 촬영 속에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순풍산부인과>는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역주행'하며 시대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데뷔 60년 차인 선우용여는 평소에도 "재미있게 살아라", "나를 위해 살아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오늘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오더라. 그 아픔이 오기 전에 미리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남도 사랑하게 된다. 나를 미워하면 남도 미워진다"는 게 그의 인생 철학이다.
갑작스러운 뇌경색을 겪으며 몸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선우용여는 당시 남편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고 회상했다. 그 순간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이후로는 남편이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생은 연습이다. 뭐든지 좋은 것도 자꾸 하다 보면 내 것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싶어지고, 혼잣말도 하고 싶어진다. 거울을 보며 '용여야, 잘 잤니? 예뻐졌네?'라고 말하는 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선우용여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짜 1등"이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삶은 물 흐르듯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파도가 세게 칠 때도 있고,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주어진 것을 한탄하지 말고,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다 온다. 추운 겨울이 왔을 땐 '조금만 기다리면 봄이 오겠네' 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봄은 반드시 온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 누구에게나 앞으로의 삶은 남아 있다. 젊다고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나이 들었다고 얼마 안 남은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이제 나를 더 사랑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시작이다. 건강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떠날 수 있는 삶, 노년이 오기 전에 나를 챙기는 삶을 살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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