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링시저> 공연 사진
토브씨어터컴퍼니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희곡을 통해 줄리어스 시저 암살과 이후 벌어지는 각종 격변을 그려냈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권력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 <줄리어스 시저>는 비극을 논할 때마다 꾸준히 거론되는 명작이다.
이러한 <줄리어스 시저>를 원작으로 삼아 재창작된 연극 <킬링시저>가 5월 10일 개막했다. <보도지침>, <초선의원> 등을 창작하며 이름을 알린 오세혁 작가가 재창작을 맡았고, 그동안 도전적이고 신선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김정 연출가가 참여했다.
김준원, 손호준이 줄리어스 시저와 이후 등장하는 옥타비아누스 시저를 연기하고, 시저 암살을 주도하는 브루터스는 유승호가 맡는다.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에는 양지원이 분한다. 이중 손호준, 유승호, 양지원은 지난해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시저 역(김준원·손호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캐스트로 진행된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외 서창호, 손지미, 권창민, 김동원, 홍은표, 김재형, 박창준 등 7명의 코러스 배우가 참여해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다. <킬링시저>는 7월 20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권력의 공백기에 찾아오는 혼란
▲연극 <킬링시저>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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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는 시민의 사랑으로 영웅이 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절대 권력을 지닌 신이 되고자 한다. 이를 지켜보는 브루터스는 줄리어스 시저를 막지 않으면 로마가 위험해질 것이라 판단한다. 이후 브루터스는 카시우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시저 암살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때 브루터스는 함께 암살을 행한 동료들을 '해방자들'이라고 부른다.
시민들은 브루터스가 시저를 죽인 이유에 공감하는 듯 브루터스에게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브루터스는 광장에서 자신이 시저를 죽인 이유에 대해 연설한다. 광장에서의 브루터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킬링시저>뿐 아니라 원작인 <줄리어스 시저>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브루터스는 연설에서 로마, 그리고 공화정을 위해 고민 끝에 시저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연설한다.
브루터스에 이어 안토니우스가 연설을 시작하는데, 브루터스의 연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브루터스가 로마를 명분으로 시저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처럼,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명분으로 시저를 옹호한다. 해방자들이 비판하는 시저의 통치 행위는 모두 로마를 위했던 것이라는 식이다.
양 극단의 주장이 내세우는 명분이 같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 명분에 동의하며 한때 브루터스를 지지하던 시민들은 어느새 입장을 바꿔 지지를 철회한다. 또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연극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다.
"정의와 진실은 웅변이 필요없다. 그 자체로 웅변이니까."
▲연극 <킬링시저> 공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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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에 나서는 브루터스는 이 대사를 믿는다. 제 아무리 수려한 웅변도 정의와 진실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시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인다. 그런데 시간을 거듭하며 브루터스는 지지를 상실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한다. 이를 보며 필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상상했다.
첫째 브루터스가 정의와 진실을 오롯이 추구하지 않았거나, 둘째 정의와 진실은 수려한 웅변에 가려지기 쉬운 것이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완전히 별개로 작용하진 않겠지만, 필자는 그래도 두 번째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싣는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기원전의 로마도,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사회도 넘쳐나는 웅변에 본질이 설 자리를 잃은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럴 때일수록 시민의 분별력이 강조되어야 한다.
비극을 끊어내는 건 결국 시민의 몫
▲연극 <킬링시저> 공연 사진토브씨어터컴퍼니
줄리어스 시저가 사라진 로마에는 혼란이 찾아온다. 브루터스와 해방자들은 위험한 인물을 몰아냈으니 로마에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줄리어스 시저 못지 않은 옥타비아누스 시저가 권력을 쥐고, 로마 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시저의 이름은 죽지 않는다."
옥타비아누스 시저가 무대 중앙에서 힘주어 말하는 대사다. 그렇게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 권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유명한 경구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면,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에게 봉사하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시민의 역할이 강조된다.
연극 막판에 이르러 궁지에 몰린 브루터스는 "로마는 수많은 해방자들의 시체 위에 세워졌다"는 말을 내뱉는다. 시저라는 최고 권력자의 이야기로 시작한 연극은 결국 지금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쓰러져간 무수히 많은 시민들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킬링시저>는 좋은 시민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군부 이후 신군부를 겪었고, 신군부가 몰락한 뒤 국정농단을 겪었으며, 최근 불법 계엄으로 다시 권위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줄리어스 시저가 사라진 뒤 옥타비아누스 시저가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이 오버랩을 지켜보며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시금 느낀다. 대선을 앞둔 지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 시민의 역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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