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 나라에 제대로 된 보수가 있는가. 보수가 무엇인가. 지키는 자들이다. 안보와 애국, 자유와 경쟁, 책임이며 희생, 그리고 절차와 같은 것들을 우리는 일찍이 보수가 지켜야 할 미덕이라 가르치고 배워왔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세계 여러나라 민주정에선 보수정당이라 불리는 정치집단이 이와 같은 가치를 내세워 저들의 지지자를 결집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지키지 않는 이들은 보수적일 수 없다. 비겁하거나, 제 나라 국익을 저해하거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 보수 정치가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건 그래서다. 리처드 닉슨이 실각에 이른 결정적 계기가 다른 실정이 아닌,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는 점은 상당한 시사점을 안긴다. 조지 W. 부시는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실상 패전하고, 이라크에서도 고전하며 리더십에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는 부패 스캔들을 겪으며 추락했다. 보수란 제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여 무너지는 법이다.

좌파 감독이 찍은 우파 정치인 이야기

 <마지막 공화당원> 스틸컷
<마지막 공화당원> 스틸컷JIFF

한국의 오늘을 보자면 보수가 도대체 무얼 지키는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저 보수정당의 꼬락서니를 보자면 참담하다. 보수의 기치가 민망하게도 저들은 윤석열의 지난 선택에 한 번도 맞서본 일 없는 김문수를 최종 후보로 선출했다. 윤석열 정권이 낳은 한덕수 전 총리가 국민의힘에 입당하는 등 경선과정을 무시하는 듯 보이는 촌극도 벌어졌다. 일련의 과정 가운데서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를 외친 국민의힘 의원이 몇이나 되었나. 국민의힘 탈당 뒤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김상욱 의원 정도를 제외하곤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스티브 핑크의 <마지막 공화당원>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화제작이다. 88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를 전주국제영화제는 '다시, 민주주의로' 섹션으로 특별히 들여왔다. 해당 섹션은 한국과 유사한 정치상황을 지나온 여러 나라, 필리핀과 브라질, 슬로바키아와 노르웨이, 수단, 그리고 미국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채워졌다. <마지막 공화당원>은 이중에서도 각별히 인기를 끈 작품으로, 개중에서도 가장 정치상황이 잘 알려진 미국의 이야기란 점에서 화제가 됐다.

감독 스티브 핑크는 소문난 좌파 감독이자 코미디언으로, 그가 공화당 정치인의 다큐를 찍었단 점에서부터 관심을 모았다. 그의 카메라 앞에 선 건 미국 일리노이주 연방 하원의원 애덤 킨징거(Adam Daniel Kinzinger)로,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을 받은 건 킨징거가 아니라 핑크라 보아야 옳겠다. 말인즉슨, 킨징거에겐 인터뷰며 출연을 청하는 제의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렇다. 지난 2021년 1월 6일 미국에선 역사에 기록될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뒤 수천 명에 이르는 폭도가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점거한 사태였다. 대선결과는 조 바이든의 승리를 가리켰으나, 현직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는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측근들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퍼뜨리는 걸 방조했고, 지지자를 선동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폭도들은 국회가 조 바이든 당선인의 대통령 인준을 막기 위해 국회에 난입해 점거했다. 미국 최고 권력기관이 자국 국민들에게 점령된 초유의 사태였다. 진압 과정에서 경찰 포함 죽고 다친 이들이 여럿 발생하기까지 했다.

킨징거는 폭동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은 첫 공화당 의원이다. 사실 그는 아이 때부터 공화당 출신 주지사를 응원한 골수 공화당원이었다.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2011년부터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을 역임하며 한때 주지사 선거에 나갈 후보로 꼽힐 만큼 유망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승복하지 않고 음모론을 퍼뜨린 트럼프를 겨냥해 날을 세웠다. 습격이 있던 다음날, 공화당 하원 의원 중 최초로 "수정헌법 제25조를 발동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어 하원이 표결에 부친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졌는데, 공화당 하원 의원 197명 중 이런 선택을 한 것은 킨징거를 포함한 단 10명뿐이었다. 이후 킨징거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친구와 가족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고, 경력에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지속적으로 탈당요구를 받았고, 본인의 정치생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까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정치 생명 끝나버린 마지막 보수주의자

 <마지막 공화당원> 스틸컷
<마지막 공화당원> 스틸컷JIFF

킨징거의 결정은 정치적 생명엔 치명적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인지도를 급격히 올려주었다. 그저 평범한 하원의원 중 하나였던 그가 전국구 저명한 정치인이 되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유명세와 정치적 영향력은 영 딴 판이어서 민주당에서 보수적인 그를 그닥 반기지 않았고, 공화당에선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탈당하라 압력을 넣었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스스로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영으로 튕겨져 나온 정치인, 킨징거의 내밀한 이야기가 <마지막 공화당원>의 주된 줄기가 된다.

임기 종료를 14달 앞둔 킨징거와 유쾌한 감독 핑크가 만나 찍어낸 영화는 과연 그들만큼 뒤가 없다. 킨징거는 감독이 빨갱이나 다름없는 공산주의자라 여기지만, 그가 제법 새끈한 영화를 만들어왔단 사실 만큼은 인정한다. 감독이라고 해서 킨징거가 대단한 정치인이라 여기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용감하고 꼿꼿하단 점에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감독과 출연자로 만난 건 이토록 작은 인정의 지점 덕분이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묻는다면 말을 아낀다. 아마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감독과 출연자 사이의 접점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일 테다. 킨징거의 결정 아래 자리한 결심을 영화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단 인상이 크다. 드러나는 건 말로 표현된 표면적 생각일 뿐, 뿌리 아래 깃든 가치와 의심, 용기와 욕구에 대하여선 얼마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단 인상이 크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JIFF

이 영화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한국의 오늘에 유의미한 물음을 여럿 던지고 있다. 킨징거가 지키려 한 가치, 그와 같은 정치인이 채 얼마 되지 않는 지형, 그리하여 공화당에서 쫓겨나다시피 밀려나는 결말이며 트럼프의 승리와 복귀,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장나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한국의 오늘과 유의미하게 엮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킨징거 만큼은 아니래도 윤석열 정권에 소리 높여 저항한 김상욱 의원, 그를 탈당토록 한 국민의힘이란 정당, 그 정당에 남아 부조리를 외면한 비겁한 정치인들의 운명이 영화와는 다를 것이란 점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는 김상욱의 손을 들고 그 이름을 연호한다.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내란을 모의하고 법원을 습격한 이들을 한국사회는 엄정하게 심판하려 들 테다.

<마지막 공화당원>은 보수의 가치를 보수답게 지키려 한 이의 최후를 그린다. 한국사회는 과연 어떠한가. 보수를 참칭한 이들로부터 보수의 가치를 쟁탈하고 빼앗겼던 지난 시간을 뒤집는 귀한 역사를 이제 막 쓰려 하는 게 아닌가. 2025년 6월 3일 대선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공화당원>과는 다른 결말을 기대하는 건 한국사회에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어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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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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