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행> 스틸컷
영화 <산행> 스틸컷JIFF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안함을 야기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했어요. 무언가에 홀린 듯한, 혹은 빠져버린 듯한 남자의 모습이 온갖 상상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가령 이 모든 상황이 결국은 모든 걸 잃은 남자의 기억 속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자신의 전부를 잃은 그 날에 멈춰버린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건, 물론 정확히는 모르지만, 영상에서 오래된 느낌을 주는 기술적인 효과가 컸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영화 <산행>은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들여다보는 듯한 여운을 주는 영화였어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상영작 <목인>의 주연 자격으로 영화제를 찾은 김한 배우의 말이다. 불안, 상상을 자극하는 영상과 소리, 작품 전체를 마치 인물의 기억이라 느끼도록 하는 연기와 연출, 그리하여 누군가의 아픈 사연을 파편적인 영상으로 건너다보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끔 하는 작품이란 평이다. 그렇다. 나 또한 그와 얼마 다르지 않게 느꼈다. 영화 <산행> 이야기다.

비 갠 산골마을, 오누이의 산행

<산행>은 <목인>과 함께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공식 초청돼 상영된 18편의 단편 가운데 하나다. 올해 코리안시네마 초청작이 양적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곤 하지만, 장편과 단편을 합쳐 모두 200편을 훌쩍 넘는 작품 가운데서 추렸단 점을 감안하면 하나하나가 나름의 승부수를 가진 인상적 작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이루리 감독의 22분짜리 단편은 제목인 '산행'에서 연상할 수 있는 통상적 풍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히말라야 중턱까진 거뜬히 오를 듯한 등산복을 입고서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경쾌한 걸음은 영화 속 어디에도 없다.

배경은 북한과 접경인 산속 작은 마을이다. 겸과 솔이란 어린 남매가 무엇을 줍고 뜯으려는지 함께 뒷산을 오른다. 한바탕 비가 퍼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 마을로 이어지는 강 하구는 잔뜩 물이 불어 있고, 상류로부터 이런저런 것들이 떠내려 온 듯이 보인다. 멀리서는 간간이 포사격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남에서 쏘는 건지 북에서 쏘는 건지 그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영화는 응집력 있는 서사 대신 영상과 소리, 파편화된 장면들이 빚어내는 분위기로 작품을 이어간다. 어린 남매의 시간 사이로, 과거 폭발물에 상해 손이 잘린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아이들을 찾는 듯한 중년의 사내, 집나간 개를 찾는 마을 주민의 모습까지가 카메라 위를 지나쳐간다 어딘지 스산한 기운을 자아내는 화면과 마음을 불안케 하는 음악이 당장이라도 불온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안긴다.

<산행> 가운데 모든 걸 망치는 비극 같은 건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와 그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의 모습이 차례로 비쳐질 뿐이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당장이라도 파행적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을 안는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표정 위에서 그 불안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손이 상한 할아버지와 아이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더욱 자극한다.

십수 년 전, 나는 군생활을 강원도 화천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있는 GOP(General OutPost·일반전초) 철책선의 초병으로 보냈다.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약 1.5~2km 거리를 두고 늘어선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즉 남한과 북한의 철책들을 우리와 저 북방의 병사들이 지켰다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보이는 그들과 우리의 사이에는 70년 전에 그친 전쟁 뒤 밟은 이 없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큰 비가 오고 나면 때때로 펑- 펑-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던 터다. 그건 비가 걷어낸 지뢰들이 저 홀로, 때로는 들짐승에 밟혀 터지는 소리였는데, 이따금은 안팎에서 작업하던 병사들이 지뢰를 밟아 사고를 당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실재하는 비극, 이들이라고 다를까

 영화 <산행> 스틸컷
영화 <산행> 스틸컷JIFF

군대에선 이런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곤 하는데,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만은 않다. '지난 십수 년 간 군장병이 지뢰를 밟아 신체절단에 이른 사고가 10여 건에 이르고 2019년엔 아예 사망하는 일까지 있었음에도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는 지극히 적었다. 어디 군인뿐일까. 산을 오르다, 낚시를 하다 유실된 지뢰를 건드려 사고를 당하는 민간인도 꾸준히 발생한다.

<산행>은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 보인다. 목함지뢰며 발목지뢰, 불발탄을 비롯한 폭발물이 떠내려오는 사례들을 우리는 수시로 접하지 않았나. 비가 내린 뒤 민간인통제선 안쪽에선 비슷한 사건이 꾸준히 보고된다. 경기도 연천이며, 고양, 김포, 인천시 강화군 일대 등지에선 매년 수십에서 수백 발에 이르는 폭발물을 수거한다고도 전한다.

실제로 폭발에 이르러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경우도 끊이지 않는다. 때로는 군인이, 또 때로는 민간인이 피해를 입는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도 어린이들이 산다. 그들에게 산과 들은 결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안전한 지대가 아니다.

그저 유실된 옛 폭발물만이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들리는 포성, 영화 안 그치지 않는 대립의 흔적들은 이 나라가 분단된 휴전국임을 일깨운다. 마을에 정착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건 일상적 삶의 모양이지만, 그 삶 전반이 불안 위에 쌓아올려졌단 걸 무시할 수 없다.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란 특수성은 전쟁을 우리네 삶과 전혀 다른 무엇쯤으로 밀어두고 살아가는 민통선 바깥쪽 사람들의 안이한 인식을 단박에 무너뜨린다.

빗물은 그야말로 온갖 것을 쓸어온다. 영화 막판 겸이가 물 속에서 집어든 공 모양 물체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폭발물이란 것을 영화 바깥 어른들은 알고 있다. 영화 속 오누이를 지켜줄 아버지는 그들 곁에 없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으나 아직 터지지 않았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아버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물 속에서 폭발물을 발견한 것인지, 이미 죽어 과거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앞서 이 영화를 본 김한 배우의 말처럼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것이 이미 아이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지난 기억인 건 아닐까. 죽기 전 아이들의 모습인 건 아닐까.

영화는 끝끝내 결말을 분명히 전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산행이 기분 좋은 모험으로 끝날지, 영원한 상처를 안기는 비극이 될지를 우리는 끝끝내 알 수 없다. <산행>이 남긴 불안은 우리가 잊고 사는 한반도의 끝나지 않은 대립을 일깨운다. 오로지 이것만으로도 이 짤막한 단편의 의도는 충분히 실현됐다 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전주국제영화제 JIFF 산행 이루리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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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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