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화이트래빗 레드래빗'(WHITE RABBIT RED RABBIT) >을 관람하려는 관객들은 이 글을 읽는 데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이 공연의 매력은 배우와 관객이 대본을 처음 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4월 30일부터 5월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되는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배우도, 관객도 이야기를 미리 알 수 없는 극이다. 지난 9일에 본 공연에서도 무대 위에는 탁자와 사다리, 두 개의 물컵만이 있었다. 언뜻 보면 단순한 무대 구성이지만 다른 연극 무대와는 다르다. 객석이 무대의 사면을 모두 감싸고 있다. 보통 공연이 시작하면 조명의 스포트라이트는 무대에 떨어진다. 관객석의 조명은 꺼지고, 다 함께 무대로 시선을 집중한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돼도 관객석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대본을 들고 읽는 건 배우지만, 관객들은 소품을 제공하기도 하고 직접 무대에 나서 연기하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나서거나 배우 혹은 작가의 지목에 따른다. 극의 중심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하얀 토끼와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쓴 빨간 토끼의 실험도 관객들이 재현한다.
이 작품에는 극작가가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본인을 드러내는 데 거부감이 없다. 관객은 물론, 배우들도 대본을 읽으며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는 군입대 거부로 여권을 뺏겼다. 일종의 '갇힌 상태'에서 낫심은 자신의 대본이 생활 환경 밖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를 궁금해했다. 이메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관객과 연결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일종의 구조 신호처럼 느껴졌다.
▲로비에 포토존(왼쪽) 이 마련돼 있다. 포토존에는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한별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 '연극'
공연 시작과 동시에 배우가 등장하는 것과 달리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공연의 프로듀서다. 프로듀서가 출연하는 배우와 함께 극을 소개한 뒤 배우를 무대로 불러들인다. 이후 무대 위 밀봉돼있던 대본을 배우에게 전달한다.
이날의 배우는 남명렬로, 내로라할 연기 경력을 지녔음에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배우가 대본을 펼치면 그 순간부터 배우와 관객은 함께 이야기를 진행한다. 작가는 대본을 통해 배우에게 관객의 수를 세거나, 소품을 구해오는 등의 행동을 주문한다. 이날 관객은 총 266명이었다. 관객 중 대략 열 명 내외가 공연에 동원됐다.
배우가 처음 보는 대본으로 관객과 호흡하는 만큼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공연의 흐름이 달라진다. 이날 공연은 미리 고지된 70분을 훌쩍 넘은 120분의 러닝타임으로 마감했다. 기존의 공연에서 배우가 해석한 공연을 관객으로서 받아들이는 기분이었다면,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배우가 대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동료로서 같이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이미 연극과 뮤지컬을 많이 봐 왔던 관객이라면, 이 공연을 보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완벽히 준비된 상태의 공연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아무리 완벽한 연기력을 선보였던 배우라고 해도 처음 마주하는 대본을 소화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이 공연 무대 위의 배우는 순발력을 갖춰야 한다.
또 이 공연은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공연 내내 지금 배우가 내뱉는 말이 배우의 말인지, 대본의 대사인지 의심하며 관람했다. 작가는 대본의 대사를 통해 관객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이런 생각을 했지?'라고 확인했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생각을 대사로 읊는 게 성가시다고 느꼈는데 점차 혼란스러웠다. 내가 생각한 건 정말 내 생각이었을까? 작가의 의도가 담긴 대본에 휘둘린 건 아닐까?
▲무대인사남명렬 배우가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공연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별
"새로운 방법으로 진행된 연극, 신기한 경험"
이 공연은 관객으로서 연극을 관람한다는 생각보다 배우와 다른 관객들이 함께 토론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남명렬 배우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여러 번 읽었고, 관객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배우가 뭔가를 '보여주는'게 아닌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공연이었다.
객석의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공연에 참여했고 열띤 반응을 보였다. 이야기 흐름도 서사의 완성이라기보다 '조종'과 '선택'이라는 단어에 대한 텍스트 해석에 가까웠다. 과연 배우와 관객들은 대본에 의해 조종됐을까, 아니면 그들은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냈을까.
아무것도 없이, 사전 정보도 없이 올라온 배우는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기했던 대본 역시 지문에 따라 64번 관객에게 전달됐다. 공연 종료 후 남명렬 배우는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연극을 해 왔지만 연극은 늘 새로운 방법으로 진행되는구나를 느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 새로운 방법들이 연극을 또 다른 길로 인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배우와 관객들은 앞서 언급한 낫심의 대본이 공연되는 시간 동안은 갇힌 사람이 된다. 배우는 대본을 통해 극을 진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관객들은 공연을 보고자 객석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박탈당한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던진 배우의 한 마디는 "우리는 자유로운가?"였다. 2010년대의 이란을 배경으로 하는 낫심의 사회와 2025년의 한국은 과연 다를까 혹은 어떻게 같을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오는 25일까지 공연된다.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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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대본으로 연기하는 배우... 예상치 못한 결말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