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끝내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둠의 경로로 접하면서부터다. 모 백화점 옆 수입도서 서점에선 관련서적을 구할 수 있었고, 학교 앞 문방구 주인장과 친해지면 LD(레이저 디스크) 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최신작 만날 기회를 얻었다(물론 자막 같은 건 없었다). 어쩌다 등장하고 곧 사라지던 국내 잡지에서 틀린 내용 수두룩한 정보를 읽고 서로 맞다 틀리다 입씨름도 벌였다. 그렇게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 토미노 요시유키와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를 만났다.

분명히 공식적으로 금지된 대상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영향력은 그 시절 또래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고, 자연히 거기 담긴 세계관 또한 파장이 적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확연히 다른 소재와 배경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현대 문명의 폭주를 경계하는 생태주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히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다.

추억의 애니메이션 중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그가 속한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은 반향과 영향력 면에서 정점에 선다. 이 비범한 창작 집단은 40년째 꾸준히 신작을 내며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는 중이다. 문화 상징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한 세대라도 기억이 희미해졌고, 입문하려면 무엇부터 접근할지 막막한 경우가 허다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그런 이들에게 길잡이가 될 작업이다.

전쟁의 폐허를 담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대중문화와 애니메이션을 접한 이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은 반드시 통과의례처럼 마주치는 존재다. 누구나 그의 대표작에 관해 봤거나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흔한 편견처럼 '아이들 보는 만화영화'라 치부하기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은 대중의 선입견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도전을 거듭해온 셈이다. 그래서 장대하고 화려한 영상미와 극적 완성도에 만족하는 이부터 작품에 담긴 작가의 강렬한 사상에 매료된 이까지 다양한 층위가 나뉠 수밖에 없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 레오 파비에의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그중 작가가 일평생 견지한 지향과 작품 세계의 연결고리에 주목하는 작업이다. 영화는 거장의 생애와 굴곡진 여정을 되짚으며 작가의 주요 작업과 실제 인생을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이미 적지 않게 축적된 관련 서적과 영상물은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 작업에 관해 정통한 내부 관계자와 전문 연구자들의 분석까지 배경 지식이 퇴적된 지층과 같은 풍성함을 과시한다.

시작은 1941년, 즉 미야자키 하야오가 태어난 해다.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격화되던 시절에 (훗날 자전적인 내용으로 완성된 <바람이 분다>에서 묘사되듯) 군용기 부품 제조공장을 경영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감독은 전쟁의 명암을 동시에 경험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수산업이 번성하던 시기에 유복한 형편과 함께, 패색이 짙어진 전황으로 여러 번 피난을 떠나고, 소도시로 옮겨온 집마저 전쟁 말 대공습으로 불타는 걸 목격한 강렬한 원체험은 그에게 평생 반전주의에 관한 신념으로 남았다.

전후 청소년기를 보내던 그는 1958년, 10대 후반에 자국산 애니메이션 <백사전>에 매료된다. 소년이 꿈꾸던 현실을 초월하는 상상 세계가 펜과 종이만 있다면 (인간의 노력을 갈아 넣어) 창조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소년은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결심한다.

1972년에 중일 관계 정상화 일부로 대여된 판다 부자를 배경 삼아 원안과 기획을 주도한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을 내놓고, 1979년엔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을 내놓는다. 높은 완성도에 힘입어 1981년엔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지만, 일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좌절을 겪기도 한다.

뛰어난 평가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진 상업적 성공에 회의적이던 평판 탓에 차기작 연출에 애를 먹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출판만화에 도전한다. 1982년 시작된 유명 만화잡지 <아니메쥬> 연재는 12년 동안 이어진다.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시작이다. 초반 작업은 1984년 동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만화는 훗날 전 7권으로 완결된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는 거의 이 작품에서 원형이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을 파괴한 7일간의 불의 전쟁 이후 인간은 살 수 없는 위험천만한 유독물질과 거대한 괴물로 가득한 신세계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거칠고 낯선 자연과 공존할지 아니면 과거처럼 정복하고 파괴할지 선택을 묻는 작업은 환상적인 시각 이미지와 함께 묵직한 인장을 새긴다. 흥행의 성공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평생 동료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이듬해인 1985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시대정신과 결합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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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스튜디오 지브리에 모인 당대의 재능들은 의기투합해 1년 단위로 애니메이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작들을 연거푸 공개한다. 1986년엔 창립 기념작이 된 <천공의 성 라퓨타>를 내놓는다. 이어서 1988년, 지금까지 초현실적인 가상 공간을 무대로 삼던 배경을 벗어나 1950년대 일본 시골을 배경으로 오늘날까지 스튜디오 지브리의 상징이 된 명작 <이웃집 토토로>가 등장한다. 인간 본위의 지배와 정복이 아니라 자연 일부로 존재하며 생태계의 일원으로 기능함을 긍정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지향이 확연해진다.

1990년, 공전의 번영을 누리던 일본 '버블'이 붕괴하고 소련이 붕괴에 직면한다. 그러나 세계평화 염원과 정반대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전쟁의 포화가 터진다. 1995년에는 옴진리교의 도쿄 전철 사린가스 테러와 고베 대지진 등의 재난이 거듭 터져 세상은 뒤숭숭하고, 불안과 선동이 범람한다. 어릴 적 온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던 군국주의 망령이 우경화와 함께 어둠을 드리운다.

그런 가운데 반전주의 색채가 짙은 <붉은 돼지>가 1992년에 탄생한다. 원래 유쾌한 단편으로 기획했으나 시대의 징후를 반영해 대폭 수정한 작품은 거대 담론에 관한 허무주의와 자유에 대한 예찬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세상에 관해 근심하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은퇴작' 구상에 들어간다.

그 결실은 1997년, 당대 일본 극장 흥행 역사를 새로 쓴 <모노노케 히메>로 구현된다. 그야말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선보였던 감독의 지향이 총망라되면서도, 어정쩡한 타협과 봉합에 그치지 않고 마치 실제 운명에 휩쓸린 삶이 그렇듯 격렬하게 전개되는 대하 드라마였다. 너무 난해하고 수위가 높아 제작사에선 우려가 가득했지만,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은 본 작품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 사족에 불과했다. 예술적 성취가 높이 평가된 덕분에 그동안 자국 위주로만 명성이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정식으로 미국 등 세계에 소개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감독의 작품에는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과 범신론적 사상이 짙은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우려와는 달리 작금의 세계가 공통으로 처한 전쟁과 생태적 위기를 예견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은 새롭게 발굴되고 재평가 기회를 얻기에 이른다.

정작 감독은 호평에 흡족하면서도 그의 작업에 반영된 현실 세계의 어둠과 비극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다만 탁상공론으로는 갈수록 악화하는 세계에 절망하기보다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찾는다. 공식 은퇴와 함께 동네 개천 정화 작업에 솔선해 매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자원봉사에 나서며, 거머리와 각다귀 유충이 득시글대던 하천에서 가재를 발견하는 기쁨을 자랑하는 모습이 정답다.

그런 거장의 영향력과 의사표시는 다방면으로 이어진다. 아카데미상 수상에 불참하며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 반전주의 의지를 표명하고,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반영해 <모노노케 히메> 세계관의 연장선에서 대자연의 파괴적 위력을 가감 없이 구현한 차기작 <벼랑 위의 포뇨>를 2008년 내놓는다.

인간 멋대로 각색한 자연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하고 종종 광폭하게 보이는 자연을 통해 데카르트 이후 서구 세계관의 기반이 된 인간 위주 지배와 자연을 자원으로만 간주하는 사고에 대립각을 명확히 한다. 해답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질문을 제시하는 감독의 혜안은 2023년 근작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까지 한결같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반세기 넘는 작품 세계를 생태주의와 평화주의 지향과 결합해 풀이한다. 이를 위해 거장의 전기를 요약하고 주요 작업과 연결해 실제 삶과 시각이 어떻게 창작에 투영되는지 분석해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철학적으로 고찰해 서구에 소개하는 권위자인 수잔 네이피어, 생태학자 티모시 머튼 같은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진 해당 분야 전문가가 대거 등장해 작업에 담긴 함의를 규명하고 해설한다. 아주 낯선 내용은 아니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해온 이들에겐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하는 기쁨의 순간일 테다.

오랜 동료들도 한마디 보탠다. 평생 동지 스즈키 토시오 PD, 친아들 미야자키 고로, 제자이자 스태프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등이 증언을 거든다. 미야자키 고로가 건축을 담당한 지브리 공원과 박물관 소개 장면에선 당장 가보고 싶은 유혹이 제대로다. 현실에 구현된 거장의 소우주이니 말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거장의 작품 세계, 어릴 적 꿈꾸던 자유롭고 평화로운 조화의 세계를 희구하는 데 이 성실하고 꼼꼼한 갈무리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유혹이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다시 지브리를 복습할 시간이다.

[작품정보]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Miyazaki: Spirit of Nature
2024|프랑스|다큐멘터리
2025.05.28. 개봉|86분|전체관람가
감독 레오 파비에
출연 스즈키 토시오, 미야자키 고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미야자키 하야오
수입/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노라이츠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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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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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포스터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포스터㈜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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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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