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해봐야겠다. 적잖은 관객이 최악의 경우를 밟는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러한 적이 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내 친구와 그 지인들, 그리고 어찌 자리를 같이하게 됐던 미술계 관계자들 또한 그러했다. 나는 그것이 최악의 경우일 뿐, 영화제를 찾는 자연스런 일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변명을 해보려 한다.

이런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제 가운데선 제법 이례적 위상을 가졌다. 말하자면 인기가 대단히 많다는 뜻이다. 빈익빈 부익부, 일류만 사랑받는 한국적 특성이라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지만, 인기가 많다는 건 어찌됐든 좋은 일이다. 책 읽는 이는 없지만 서울국제도서전은 미어터지고, 극장을 갈수록 줄지만 전주국제영화제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얘기가 들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무튼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예년보다도 더욱 흥행했다. 연휴를 끼고 영화제를 찾은 이들이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굿즈샵, 밥집과 카페, 인근 가게 하나 들어가려고 수십 분에서 수 시간 까지 줄을 서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근본은 영화 티켓을 구하는 일인 텐데, 이것이 정말이지 쉽지 않았단 건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을 테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으나 표는 인기 있는 순서로 동난다. 영화제를 찾는 이들 중엔 전 세계는 물론 영화판 안에서까지 온갖 소문에 빠삭한 이들이 여럿이다. 또 감독과 작가, 스태프, 배우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 기량이며 성향까지 쭉 꿰고 있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한국 최초 상영인 코리아 프리미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최초공개인 월드프리미어까지도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입소문이 도는 게 영화제 판이다. 그러니 좋다는 얘기가 드는 작품은 손가락 빠른 이들에게 일찌감치 점령돼 표를 구하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영화제 초짜들, 정보도 없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달려온 귀여운 초보 관객들이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들이 겨우 구할 수 있는 표는 대개가 평이 좋지 않은 장편이거나 단편모음집이다. 같은 단편의 경우에도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엔 '코리안시네마' 쪽이 인기가 있는 편이고, '한국단편경쟁'은 그보다 덜하다. 약간의 민감한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들기 위해 다른 영화제를 포기한 작품이 모이는 섹션인 때문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섹션이 작품의 성격까진 아니라도 질과 완성도를 얼마쯤 짐작케 하는 것이다.

물론 섹션마다 그를 관람하는 재미가 있다. 젊은 신진 작가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전력을 다해 기량을 뽐내려는 이들의 시도에 집중하는 게 그 같은 방안일 수 있겠다. 다른 곳에선 쉽지 않은 시도를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 단편에선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러나 이들에게 여러 문턱을 넘고 다져진 기성 상업영화의 기준을 요구한다면 제가 느끼는 완성도 또한 급전직하할 밖에 없는 일이다. 요컨대 섹션마다 그를 즐기는 다른 방법과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영화제를 처음 찾는 초보 관객들이 하필 이런 경우를 자주 마주한다. 그리고는 '이번 영화제 정말 별로였어'하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 적은 이유로 유독 이들에게 이런 불행이 자주 빚어지는 걸 이해하면서도 누군가 이들에게 그것이 영화제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줄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올해 영화제에서만 하더라도 나는 이와 같이 말하는 이를 10명 가량이나 만났으므로, 구태여 이와 같은 글을 적어 항변하고야 마는 것이다.

땀 냄새 진하게 묻어나는 복싱 영화

 영화 <건투> 스틸컷
영화 <건투> 스틸컷JIFF

<건투>는 '한국단편경쟁 4'에 포함돼 상영된 작품이다. 신유석 감독의 23분짜리 단편은 복싱 그 자체를 소재이자 주제의 얼마쯤으로 잡아 가까이서 그려낸다. 주인공은 복싱 체육관에 다니는 정수(이정수 분)로, 다가오는 시합을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는 상태다. 영화는 정수의 며칠을 뒤따르며 그와 그를 둘러싼 상황, 그리고 닥쳐오는 일들까지를 차례로 보여준다.

묵직한 체형에 딱히 날렵하다곤 할 수 없는 솜씨를 가진 정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제법 진정한 듯 보인다. 시합을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고 체육관 안에서 스파링도 한다. 그걸로 부족한지 인터넷 카페를 통해 꽤나 실력 좋다는 선수에게 스파링을 청해 원정을 가는데, 말 그대로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고 돌아오기도 한다. 스파링이 끝난 뒤 상대가 정수에게 건네는 충고는 이 둔탁한 영화에서 꽤나 강력한 펀치라인 역할을 해내는데, 만약 그와 같은 대사와 반전 아닌 반전이 없다면 이 짧은 영화는 훨씬 더 매력 없는 무엇쯤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테다.

<건투>가 대단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는 않다. 권투가 아니래도 무도 체육관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법한 순간들을 담아낸다. 쾌적한 극장 안에서도 땀 냄새가 훅 끼치는 듯한 영상은 감독이며 배우가 체육관이란 공간과 얼마나 친숙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단편은 뚜렷한 서사를 갖고 승부하지 않는다. 23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영화 내내 정수는 미트를 치고 스파링을 하고 손에 밴드를 감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필요한 것 이외에 특별히 대화를 나누는 일도 드물다. 글이며 독백으로 풀지 않는 건 물론이다. 때문에 관객은 정수의 마음을 오로지 그의 행동과 행적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권투 외 정수를 둘러싼 상황 또한 등장하지 않기에 그 모든 판단이 부정확한 추정에 그친단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건투>는 굳이 정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며 그의 심리상태를 깊이 내보이려 들지 않는다. 상대에게 알리지 않고 찾아가 스파링을 뜨고 돌아오고, 연습에선 관장의 만류에도 폭주하듯 주먹을 낸다. 거칠기 짝이 없는 이 같은 태도가 관객에게 분명하고 선명한 감흥을 일으킨단 건 흥미로운 일이다. 격렬히 맞부닥치는 복싱 경기를 보듯이.

다만 아쉬운 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건투(健鬪)', 즉 씩씩하게 맞서는 모습이 영화 가운데선 뚜렷하게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권투는 있는데 건투는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감출 길 없다. 소재인 권투를 넘어 추상적 개념인 건투를 형상화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영화 가운데 부재하거나 안이한 것이 아니었는가 묻고픈 마음이 든다.

극복하기 어려운 상대와 상황 앞에 일어나는 감정을 영화를 보는 모두가 안다. 그 감정을 얼마쯤 다룬 이 영화 <건투>가 관객에게 일으키는 감정이 또한 그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권투는 여러모로 영화가 다룰 구석이 많은 소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내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앞의 상대와 맞선다. 내 곁엔 나를 지지하는 세컨, 코치가 있다. 그 모든 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날 구석이 많다. <건투> 또한 그렇게 끌어올린 이야기일 것을 생각해보면 이와 같이 낯설고 투박한 작품과 마주해 나름의 의미를 붙들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수준에 앞서 자세를 보려는 마음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다. 제게는 영화제가 영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이다. 세계 유수의 작품을 들여와 재차 삼차 상영하는 영화제들에 비해 여러모로 함량미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또한 사실이다. 걸작 하나를 마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범작과 졸작을 견뎌내야 하는지를, 자라나는 작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 허술함과 부족함을 드러내게 마련인지를 현직 평론가로서 모를 수가 없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가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진실 또한 있다. 최초상영을 요구하며 영화제가 발굴하려 노력하는 작은 가능성 같은 것들이다. 검증된 수준 높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작품들에게도 상영의 기회를, 추가 제작의 지원을 안기는 노력을 어떤 영화제는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물론 치열한 예매경쟁을 뚫어야 하긴 하겠으나, 한국에선 닿기 어려운 목소리를 들여와 소개하는 노력을 전주국제영화제는 수행하고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저 한두 편의 감상 뒤 내가 이번 영화제를 보았노라고, 정말이지 형편없었노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영화제 입장에선 최초 상영을 요구해 받아낸 작품을 거는 섹션, 특히 경쟁부문을 운영하는 것이 그 자체로 도전일 수밖에 없다. 다른 영화제가 아닌 우리 영화제에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품작의 수준이 곧 영화제의 수준이 된다는 평가와도 정면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그를 피하지 않고 기꺼이 감당하려는 자세, 그건 용기가 아닌가. 나는 그 수준을 평가하기 앞서 그를 응원하고 싶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와 관련해, 구태여 한 작품 한 작품 그 가치와 의미를 소개하는 글을 남기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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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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