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단편영화를 가리켜 영화판의 테스트베드(Testbed)라 한다. 매장에 누워 있는 침대에 실제로 누워 그 성능을 가늠하듯이, 단편영화를 통해 신진작가의 역량과 가능성을 내다본다는 뜻이겠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카메라와 전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장편영화를 찍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거엔 고가의 필름과 카메라가 필요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값비싼 필름을 구하기 어려웠던 젊은 작가들이 남는 자투리 필름을 이어붙여 짤막한 영화를 만들고는 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전설처럼 남아 있다.
단편영화가 젊은 작가의 등용문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러닝타임이 적어도 90분가량은 되는 극장용 장편영화 대비 제작비가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아직 검증이 이뤄지지 않아 투자가 되지 않고 가용가능한 제작비도 적은 작가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단편이 매력적일 밖에 없다. 길어야 30분 내외의 단편으로 저의 역량과 자질, 가능성까지를 내보이는 게 단편영화의 흔한 목표가 된다.
▲외출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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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작가의 가능성과 마주하는
단편영화는 신진작가의 등용문일 뿐 아니라 연습의 장 또한 제공해준다. 단 몇 회차 촬영으로 한 편의 작품을 뚝딱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장편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때문이다. 단순히 방구석에서 쓴 시나리오를 넘어, 현장에서 스태프며 배우들을 지휘하고 조율해 한 편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연출자에겐 반드시 필요한 수련의 과정이 된다.
한국 주요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를 본다는 건 젊은 작가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오늘은 미약하지만 마침내는 창대해질 젊은 작가의 재능을 살펴 미래를 가늠하는 일이다. 때로는 번뜩이는 재주가 있고, 탁월한 기량이며 선명한 개성이 있는 작품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보다 자주 뾰족한 구석이란 없는 범상함에 하품을 하게 될 때도 있으나, 어찌됐든 각자의 최선을 쏟아낸 결과물을 마주한다는 건 한 명의 평론가에게도 솜털이 곤두설 만큼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규동 감독의 <외출>은 한국단편경쟁 섹션에 출품돼 '한국단편경쟁 4'로 묶여 상영된 작품이다. 18분 짜리 영화는 월드프리미어, 말 그대로 이번에 전 세계 최초상영으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이들을 첫 관객으로 맞이했다. 1999년생, 올해로 26살 젊은 감독 김규동은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 재학 중으로, 교내 워크샵으로 찍은 이 작품이 공식적으로 첫 단편이라고 전한다.
▲외출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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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애인 찾아 나선 외출 나온 일병
영화는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출을 나온 병사 주민형(주민형 분)의 이야기다. 이제 막 일병 약장을 단 듯한 그는 짧은 외출을 나온 기회에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막상 찾아온 여자친구의 집엔 그녀는 오간 데 없고 웬 이삿짐센터 직원이 짐을 옮겨 담고 있다. 군대에서부터 여자친구와 연락이 끊긴 모양인 주민형 일병은 남몰래 집에서 빈 화분을 하나 훔쳐들고 나와 무작정 인근 거리를 걷는다.
영화는 민형이 어떠한 단서도 없이 여자친구의 집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과 그가 그녀와 만나 나누었던 마지막 시절을 오가며 펼쳐진다. 또 이삿짐을 옮기는 아저씨와의 짤막한 대화, 화분을 들고 찾은 동네 꽃집 주인과의 이야기, 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민형의 모습까지를 정처 없이 떠돌 듯 내보인다.
당혹스러운 지점도 없지 않다. 외출 나온 군인에게 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와 같은 경험이 있는 누구나 이 시간이 러닝타임 동안 긴박하게 쓰이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와 같은 기대를 그대로 분질러 버린다. 영화의 끝에서 관객은 생각하게 된다. 특별히 하고픈 말이 있어야 영화가 되는 것일까, 세상엔 우리가 끝내 닿지 못할 이야기들도 있지는 않은가를.
▲외출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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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보여줄 뿐이다
관객에게 납득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그저 벌어지는 일로만 러닝타임을 채우는 영화다. 외출 나온 주인공이 대체 왜 여자를 찾는 건지,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인지, 화분의 운명은 또 어떠할지를 관객은 끝내 알 수가 없다. 그는 영화의 관심이 아닌 듯 보인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차라리 영화가 그리는 모습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도 든다. 삶 가운데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 제대로 아는 이야기란 손에 꼽는 법이니까. 대부분은 될 대로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끝내 전해지지 않으니까. 남의 이야기란 대개 남의 이야기로 끝나고 마니까. 말하자면 <외출>이 영화적이진 않다는 이야기다.
영화란 관객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설득하는 거라고, 납득케 하는 거라고 여기는 이에겐 모자란 작품처럼 여겨질 수 있겠다. 내가 꼭 그러하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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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입대 후 연락 끊긴 애인, 외출 나가 찾아갔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