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때가 있더라. 예전에는 감히 저 큰 스크린에 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저세상은 내가 언젠간 경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연극을 하던 시절에 어느 날 주인공이었던 선배가 제게 주인공 대사 좀 외워두라고 하더라. '알겠습니다'하고 그 많은 대사들을 다 외웠다. 그러다 정말 대역으로 갑자기 무대에 서게 됐다. 그 무대를 통해 다시 많은 연출가가 저를 보게 되었고, 조금씩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은 좀 길어지더라도, 분명히 때가 있을 거다."
10년 무명을 딛고 글로벌 흥행배우로 자리매김한 박해수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5월 14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배우 박해수가 출연했다.
넷플릭스 공무원 박해수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배우 박해수.
tvN
박해수는 <오징어게임>·<수리남>·<슬기로운 감빵생활>·<종이의 집>등 여러 화제작에 출연하여 '넷플릭스 공무원'이라는 별명까지 얻을만큼 연기력과 흥행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최신작 범죄스릴러 <악연>에서는 극의 긴장감을 주도하는 목격남 '김범준' 역할로 악역의 정수를 선보였다.
박해수는 미스터리하고 섬뜩한 김범준을 연기하면서 '조커(배트맨 시리즈)'의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대본에서 '킥킥댄다'는 식으로 웃는 장면이 유독 많았다. 그 웃음이 '오만함'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장난스럽게 여기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다며 악행을 일삼는 모습이 조커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휴대폰 배경화면도 조커로 했다."
<악연>에서 김범준이 신성한 성당에서 물 대신 성수를 약과 함께 벌컥벌컥 들이키는 섬뜩한 장면은 현장에서 이일형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성사됐다고. 촬영장소가 실제로 경건한 분위기의 진짜 성당이라 박해수는 연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고 전했다.
또 박해수는 "내성적이지만 상황마다 가끔은 소심한 관중 끼도 있다. 소극적이면서도 누군가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더라"면서 "식당에 가도 웬만하면 사람들이 바라봐 주시는 쪽으로 앉으려고 노력한다. 회사 식구들은 등지고 앉으라고 하는데, 저는 '반찬 하나 더 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고 고백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박해수는 자신의 출세작인 <오징어게임>을 빗대어 아들을 '오징어 보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을 전했다. 2021년 9월 17일은 <오징어게임>의 시즌1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날이자, 박해수의 아들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4시에 오픈했는데 10분 뒤에 아들이 태어났다. 운명같이 느껴져서 그때부터 오징어 보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전했다.
박해수의 아들은 5살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아버지의 직업이 배우라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가 연기한 출연작에서의 역할이 어린 아이들과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내용들이어서다. 박해수는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해수 알아본 이수영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배우 박해수.tvN
박해수는 고등학생 때 연극부에 가입하며 처음으로 연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당시 연극반에서 박해수의 잠재력을 알아본 인물이 고교 선배였던 가수 이수영이었다고. 당시만 해도 한창 방황하던 시기를 보내며 연기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이수영은 "넌 연기 안 해도 된다. 존재만으로 빛이 난다"고 칭찬하며 격려했다. 박해수는 이후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오랜 무명생활을 거쳤다. 박해수는 생계를 위하여 무대 조감독으로 가수 이문세의 콘서트에 참여했고, 서빙부터 산타클로스 분장까지 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2007년 마침내 연극무대를 통하여 처음 배우로 데뷔하면서 공연계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갔다.
박해수는 당시 청소년 잔혹극 <사춘기>를 공연할 때 만났던 한 관객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떠올렸다. 공연이 끝나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여고생 관객은, 알고 보니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것을 고민하던 차였다. 관객은 "작품을 보고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고 고백하며 마음을 돌렸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성인이 된 해당 관객은 다시 박해수의 공연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사회생활이 힘들어 고민하던 관객은 박해수의 연기를 보며 또다시 힘을 얻고 돌아갔다. 재차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관객에게 박해수는 "제가 더 감사하다. 연기 인생의 중간에 그런 관객들을 한 번씩 만나면 저도 다시 원점(초심)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밝혔다.
박해수가 연극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빛을 발하기까지는 약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2017년, 37세의 늦은 나이에 선보인 첫 주연작인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박해수라는 배우의 이름을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으로 꼽힌다.
"기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원호 감독님과 이우정 작가님이 낯선 배우를 주연으로 하는 게 도전이었을 텐데, 결정해주신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정경호 배우(이준호 역) 역시 주연급인데 '주인공의 친구' 역할로 나와줘 고마웠다. 그런 작품이 제 첫 주연작이라 더 감사했다."
정작 오디션 당시만 해도 박해수는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는 "작가님이 대본을 주시면서 '김제혁(슬감생의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대사를 읽어 달라고 하시더라. 대본을 읽는데 인물이 계속 나오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계속 나오지'하고 당황했다"며 "그제야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음에도, 오디션에서 박해수의 연기에 감명과 확신을 받은 신원호 감독은, "해수씨, 같이 합시다"라며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 야구 선수 역할이니까 어깨를 최대한 넓혀 오라는 감독의 주문 한 마디에, 책임감이 발동한 박해수는 본인의 표현대로 "목숨 걸고 운동해서" 완벽한 야구 선수의 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슬감생>의 첫 방송 만에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자 박해수는 "이거 어떡하지? 마음이 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경험이라 너무 신기했다" 며 처음 받아보는 인기와 관심에 당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어 "오히려 제 주변 사람들이 더 불편해 하더라, 저랑 같이 가다가 사람들이 알아보면 뒤로 떨어진다거나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알아 봐주신건 아니고, 열에 둘 정도였다 "고 소심하게 부연했다.
이후 그는 2021년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1에서 미워할 수 없는 빌런 '조상우' 역을 열연하며 글로벌 흥행 스타로 부상했다. 박해수는 <오징어게임>으로 에미상 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가 하면, <종이의 집>, <수리남> 등 여러 흥행 대작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며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오징어게임> 이후 달라진 점에 대해 박해수는 "조금 오만방자해짐이 있었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박해수는 오랜 무명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누구나 자신만의 때가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인 연극배우 시절, 선배의 권유로 주인공의 긴 대사를 모두 외워뒀던 박해수에게 갑작스러운 대역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무대를 통해 많은 연출가가 처음으로 그의 연기에 주목했다. 이후 큰 배역들이 하나둘씩 찾아왔고, 이는 영화와 드라마 진출로 이어진다. 스스로 "노력은 미친 듯이 했다. 오리처럼 발버둥 쳤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10여년 전만 해도 본인이 스크린 위에 서는 순간이 올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다는 박해수는 이제는 어느덧 관객들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박해수는 "너무 감사하고 영광"이라며 겸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제가 그랬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분명히 때가 있을 것"이라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응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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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무명에서 넷플릭스 공무원까지... 박해수를 버티게 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