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인의 성난 사람들공연사진
극단 산수유
법학을 공부한 이라면 누구나 윌리엄 블랙스톤의 저 유명한 법언쯤은 외고 있을 테다. '범인 열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사람 하나가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하여 현대 법치국가는, 설령 법 위에 독재정권이 군림하는 허울 뿐인 법치국가라 할지라도 무죄추정의 원칙 정도는 보장한다.
▲경찰이 유죄의견으로 송치하고 검찰이 기소하여 법정에 세운 피의자라 할지라도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본다는 것 ▲아무리 유죄가 의심되는 이라 할지라도 변호인 선임을 비롯해 법적 방어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하는 것 ▲피의자가 제 결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기소한 검찰에게 죄를 입증할 책임을 두는 것 ▲혹여나 있을 수 있는 법체계의 실패에 대비하여 항고와 재항고, 재정신청, 나아가 3심제까지를 예비하는 것
이 모든 장치를 통하여 무고한 이가 억울하게 짓밟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모든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미국 연방대법원이 50개 주 법원으로 하여금 배심원단 유죄평결을 만장일치로 하도록 강제한 것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단 한 명의 반대라도 유죄를 깰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죄를 묻는단 건 그토록 엄정하고 엄격하게 이뤄져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저들의 법정신이란 이야기겠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가장 약한 고리는 인간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스스로가 예비한 장치를 너무나도 쉽게 망가뜨린다. 연극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이 내보이는 것도 꼭 그러해서, 무작위로 불려온 12명의 배심원 대다수는 저희들이 이 방 안에서 하는 결정이 어떤 가치와 희생 위에 선 것인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에 도통 관심이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지식조차 없다. 일면식도 없는 누구의 목숨을 좌우할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객석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두통이 몰려들 만큼 한심하다. 마치, 오늘의 세상이 실제로 그러하듯이.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이 법정드라마를 넘어 민주주의의 근간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건 그래서 차라리 자연스럽다. 민주주의를 가리켜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의 체제라고 하는 건, 투표권을 가진 모두가 다른 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다원주의와 법치주의가 보좌하도록 하는 한편, 교육을 통하여 역량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의심하는 만큼 정의롭다
▲12인의 성난 사람들포스터극단 산수유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한국사회는 다원주의의 가치체계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음을 매순간 목도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구호 또한 그저 구호로만 남았음을 알고 있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고 일확천금이 장래희망인 세상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모른 척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연극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은 저기 원작에서 헨리 폰다가 연기한 8번 배심원의 역전극을 그대로 재현한다. 다른 이들의 거센 비난 앞에 끝끝내 원칙을 지켜내는 이의 승리를 거의 숭고하게까지 그려낸다. 다른 11명의 배심원, 각자의 편견과 고정관념, 아집과 확증편향,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된 못난 생각들이 하나하나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모습임을 과장 없이 일깨운다. 그 모든 과정 끝에 마침내 평결을 내는 이 드라마의 결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는 이를 일러 희망이며 변화의 가능성이라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공감하고 다가서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증거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의 설정, 누군가의 죽음이란 극단적 결과와 만장일치 이전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폐쇄적 환경이 오늘의 세상엔 없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죽음보다 훨씬 더 중한 결정을 우리는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내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 수많은 불의한 결정들이 고도로 분업화 돼 그 책임을 어느 누구에게 겨냥해 물을 수 없도록 하고 있고, 또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와 끝까지 마주 앉아 진득하게 설득하고 설득 당하지는 않는 것이다.
전쟁과 기후위기, 독재며 차별 같은 문제들이 연극 속 몇몇 못난이들 탓으로 일어나지 않는단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이 오늘의 세상에 희망이 아니라 절망처럼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한국, 나아가 인류에겐 희망이 있을까? 절망의 언덕에서 희망을 구할 단서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걸까?
현대철학은 인류에게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열쇠를 찾아주는 데 완벽히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인류가 철학의 무력함만을 확인한 건 물론 아니다. 철학은 인간에게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알려주진 못하였지만, 정의로움을 고민하는 만큼 정의로움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알려주었다. 옳음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를 끝끝내 알 수 없겠으나, 적어도 의심하는 만큼은 그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저 브레히트가 의심을 찬양한 것도,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이 오로지 절망적이기만 한 이야기는 아닌 것도, 모두가 이 때문이다.
25. 5. 14. 19:30 / 서울 대학로 민송아트홀 / 극단 산수유 / 12인의 성난 사람들
김애진, 박시유, 남동진, 신용진, 김도완, 황비홍, 강진휘, 한상훈, 이종윤, 홍성춘, 현은영, 반인환, 오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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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