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리안시네마'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내 최초 상영(코리아 프리미어)을 갖는 작품들을 모아 소개하는 섹션이다. 처음부터 해당 섹션에 출품한 작품 및 경쟁부문에 신청했으나 탈락한 작품 가운데 영화제 측의 기준에 맞는 영화를 추려 선정한다. 역대 최대규모 신청이 몰린 올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장편 20편, 단편 18편의 작품이 최종 선정돼 상영됐다. 단편은 모두 5개 섹션으로, 각 3편의 영화가 함께 묶여 상영됐다.
사실 전주국제영화제는 그 출발부터 '대안'과 '독립'을 지향으로 밝힌 바 있다.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그 성향이 보편에 다가서고 수준과 품격 또한 갖추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럼에도 대안과 독립은 이 영화제의 여전한 지향이요, 색깔이다.
작품수급은 영화제의 가장 큰 고민이다. 영화제의 근간은 작품과 관객, 작가와 업자들 사이의 만남이 아닌가. 다른 영화제와 차별화되는 작품을 가져와 저를 찾은 이들 앞에 펼쳐내는 게 영화제의 품격을 이룰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만만찮은 일이니, 경쟁하는 다른 영화제 또한 작품 수급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향과 지향이 겹치고, 규모 또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영화제의 경우, 서로 더 나은 작품을 수급하기 위해 경쟁한다. 승리하는 영화제는 앞서가고 패배하는 영화제는 뒤처지게 마련, 더 나은 영화제가 되기 위해서라도 더 나은 작품을 따와야 하는 건 영화제의 생리다.
▲울며 여짜오되스틸컷
JIFF
차별화하려는 영화제, 그 노력의 결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인기 있는 섹션 중 하나가 코리안시네마다. 한국 내 규모와 명성 모두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음에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하는 작품군을 만들어야만 이 섹션의 질이 유지될 수 있다.
그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탈락한 작품만을 모아 상영한다면 누가 전주국제영화제의 가치를 인정해 주겠는가. 그리하여 전주국제영화제는 젊고 유망한 작가를 발굴해 제작비를 지원하는 대가로 국내 최초상영을 전주에서 하라고 요구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좋은 작품을 수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처럼 안주하는 대신 경쟁하는 자세가 있는 한, 한국 영화제에 아직은 활력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테다.
<울며 여짜오되>는 '코리안시네마 단편 1'에 속한 작품이다. 1996년생 젊은 감독 남서정의 27분짜리 단편으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듬지> <저는 단지 보고를>을 연출한 남서정의 세 번째 영화는 집 안 금고에 넣어뒀던 금덩이를 들고 사라진 동생 해준(김수현 분)과 그를 찾아와야 하는 누나(김세원 분)의 이야기로 꾸려진다.
▲울며 여짜오되스틸컷
JIFF
동생을 찾으려는데, 아는 게 없다
집 나간 동생의 행방은 묘연하기 짝이 없다. 누나는 동생이 갈만한 곳은 물론, 가출의 이유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단 동생이 다니던 학교로 가보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우연히 만난 동생 친구들에 말을 붙여 보지만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동생을 찾는 과정은 제가 동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며, 다시 그를 이해하려 시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울며 여짜오되>는 동생을 찾으려는 누나의 노력 가운데 가출사건을 보도하는 지역언론의 이야기를 배치한다. 아버지가 평소 알고 지내는 언론사 건물 수위에게 부탁하여 그곳 기자의 도움을 받는단 게 기본적인 골자다. 그러나 상황은 누나의 기대와는 영 딴판으로 흘러간다. 동생을 찾기 위한 보도가 아닌, 금덩어리를 들고 집을 나갔다는 소식만 큼지막하게 적혀 있어서다. 보도로 동생을 찾기는커녕, 동생이 더 위험해질지도 모를 일. 차라리 기사를 내리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흔히 '별주부전'이라고도 알려진 <수궁가> 가운데 한 대목이 '별주부 울며 여짜오되'다. 용궁에 꾀여 온 토끼가 꾀를 내어 용왕에게 아뢰길, 제겐 간이 없다고 물 밖으로 나가 가져오겠다고 하자 자라가 간곡히 이를 거짓이라 충언하는 대목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토끼는 물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용왕의 병을 고칠 마지막 수단은 그렇게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울며 여짜오되>가 어찌하여 이 대목을 제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는지는 불명확하다. 자라에 속아 물 안에 들었으나 기지로 탈출하는 토끼, 그를 믿지 않고 토끼를 믿어 일을 그르치는 용왕, 진실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자라까지. 이들의 이야기가 작품 가운데 상징으로 자리할 여지가 얼마 되지 않는 탓이다.
▲울며 여짜오되스틸컷JIFF
영화제가 이 작품을 택한 이유
가출한 동생이 들고 나간 것이 금으로 된 자라란 것 말고는 도무지 <수궁가>와의 접점을 찾을 길 없다. 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집안을 충언이 먹히지 않는 자라의 심정에서 바라본 것일까. 그렇다면 또 다른 주역 토끼의 자리는 어디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애정결핍 사춘기 소년의 가출과 그를 찾아 나선 누이의 여정이라면 구태여 <수궁가>에 매일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닐까.
영화는 결코 깊이 관여하지 않는 가벼운 터치로 누나와 동생, 유독 동생에게만 강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풀어낸다. 그 반작용으로써 집을 나간 동생이 실은 가족이 저를 찾아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 흔한 가정폭력이며 애정결핍의 사례를 떠올리게도 할 수 있겠다. 정극이라기보단 시트콤이며 소동극에 가깝지만 장르적 재미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아이디어의 부재 탓으로 웃음과 유머, 극적 긴장이며 장르적 재미를 달성할 만큼에 이르지 못했다. 성장드라마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여타의 작품과 차별화되는 지점, 또 새로운 시도라 부를 만한 구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를 곰곰이 곱씹어본다. <울며 여짜오되> 안에는 한국의 오랜 이야기로부터 끄집어낸 상징을 현대적 소재와 엮어보려는 구상, 우리 주변에 현재하는 문제를 결코 무겁지 않게 소화해 보려는 야심,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해낼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연기하려 든 배우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찌 됐든 관객 앞에 이야기를 펼쳐내려는 감독의 의욕 또한 있다. 이 영화에서 읽을 수 있는 여러 아쉬운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울며 여짜오되>가 달성한 지점 또한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들여다 봄 끝에 나는 이 영화 <울며 여짜오되>가 진정으로 하려 했던 이야기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왕을 향한 자라의 충언, 제 한 몸보다 옳음을 우선했던 자라의 태도를 이 영화 또한 얼마쯤은 견지한다. 이제야 누나는 동생을 진실로 바라보고, 그를 학대하는 아버지 앞에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울며 여짜오되, 그리하셔서는 아니 된다고 말이다. 이 세상에 필요한 건 잘못을 막아서는 용기가 아니냐고,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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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금덩이 들고 사라진 동생 찾다 깨달은 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