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홍상수, 봉준호의 중기 혹은 초창기 영화들이 모두 이 영화제를 거쳐 갔다. 올해로 44회째를 맞는 캐나다 밴쿠버국제영화제는 자타공인 아시아영화 발굴의 선봉에 서서 북미 지역에 전도유망한 한국 감독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프로그래머로 일할 당시 제정한 용호상(Dragons & Tigers Award for Young East Asian Cinema)은 바로 신진 아시아 영화인을 대상으로 한 상이었다. 아시아 영화를 향한 관심도와 진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커티스 월러스척을 지난 5일 전주시 완산구 영화의거리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토니 레인즈 사임 이후 2013년부터 밴쿠버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커티스는 2022년부터 수석프로그래머로 작품 선정 및 운영위원회 전반을 관리 감독하고 있다. 그에게도 우선적으로 세계영화산업 침체, 그리고 영화제 역할론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 기사:
"한국 영화 위축된 건 사실, 봉준호·박찬욱 잇는 감독 안 보여" https://omn.kr/2df94)
"영화인들은 항상 도전 마주해"
▲커티스 월러스척 밴쿠버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이선필
영화 비평가 출신인 커티스 월러스척은 영화제가 창작자들이 관객과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축제의 장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 4월 28일 있었던 캐나다 연방 총선 결과를 언급하며 운을 뗐다. 캐나다 내 보수당으로 정권 교체가 예상됐던 차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현 자유당이 1당을 유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에 집중한다는 자유당 기조가 정부 예산 지원을 받는 영화제에도 긍정적일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위기라는 단어 자체가 흥미롭다. 왜냐면 영화제들은 항상 도전과제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제는 현재 주정부(British Columbia)와 지자체, 연방정부에서 모두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여기에 텔레필름 캐나다(Telefilm Canada) 같은 공공기관에서도 지원받는다. 지금 정부가 문화와 예술에 열려 있어서 공적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금 규모의 영화제를 진행하며 비용이 많이 증가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여러 대처를 했는데 기업 스폰서를 활발히 찾는다든가 티켓 판매 재고 등을 적극 시도했다. 중요한 건 수익 다양화다. 여러 기관의 기부를 받기도 하고, 내부에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국고 등 공기금 지원이 상당하지만 커티스 월러스척 수석프로그래머는 "기본적으로 영화제 방향성이나 작품 상영에서 특별한 압력을 받는 것은 없다"고 답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는 밴쿠버영화제 탄생 및 성장 배경을 설명했다.
"우리 영화제가 1982년 'Ridge Theatre'라는 곳에서 시작됐다. 그러다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비영리단체가 만들어졌다. 중요한 게 1986년인데 이때 캐나다에서 세계엑스포가 열렸다. 당시를 기점으로 문화 영역에 펀딩이 확대됐다. 그래서 우리도 (영화제)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우리 영화제가 전시 성격(Exhibition)이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팬데믹 직전까지 밴쿠버영화제는 16일간 230여 개 영화를 상영했다. 그 후로 10일에서 11일간으로 기간을 줄였고 영화도 140에서 150여 개(장편 기준)를 상영하고 있다.
참고로 지난 10년간 캐나다에선 우리의 기원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대화들이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살고 있던 토착민이 있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정할 때 관련해서 정부가 어떤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 캐나다의 역사 부분을 다루는 작품을 고려하긴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화들 말이다. 여기에 더해 불평등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커티스 월러스척 수석프로그래머는 비프 센터(VIFF Centre)라는 상설 극장과 밴쿠버영화제 특유의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총 2개관인 비프 센터에선 해당 100여 작품이 상영된다. 또한 캐나다 영화인뿐만 아닌 타 국가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획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 맥락에서 밴쿠버영화제 특징 중 하나였던 아시아영화 발굴이 다소 약해진 건 아닌지 짚어볼 만하다. 1994년 만들어진 용호상은 2013년을 기점으로 사라진 상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1996)과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 그리고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2009)이 해당 상을 받았다.
"토니 레인즈가 최초로 서구에 아시아영화를 가져온 프로그래머 중 하나였다. 그가 떠난 후 더 이상 용호상은 운영하고 있진 않지만, 알아보니까 밴쿠버영화제가 생긴 이래 현재까지 약 400편의 한국 영화를 소개했더라. 그만큼 아시아영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홍상수 감독, 이창동 감독, 봉준호 감독 등 그분들의 커리어가 꽃 피기 전에 밴쿠버에서 그 영화들을 상영했다. 봉 감독의 <프레임 속의 기억들>을 아시나? 그 단편도 틀었었다.
실제로 캐나다에 아사이계 인구들이 상당하다. 특히 한국계 캐나다인은 제가 알기론 25만 명인데 상당히 중요한 커뮤니티라고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아시아영화에 초점을 가져가 보려는 시기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가을에 한국 영화 쇼케이스를 열 것이고, 인도 영화를 집중해서 소개하려 한다. 현재 70여 개 국가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이 안에서 어느 정도 아시아 영화를 상영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이다."
눈에 띄는 아시아계 감독들
▲지난해 성황리에 열린 밴쿠버국제영화제 현장.VIFF
커티스 수석프로그래머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이거나 부상 중인 아시아계 감독들을 언급했다. 중국계 미국인인 콘스탄스 상 감독의 < Blue Sun Palace >(한국계 미국인 샐리 수진 오가 제작), 한국계 캐나다인인 안토니 심 감독의 < Riceboy Sleeps > 제롬 유 감독의 < Mongrels >(전주영화제에서 상영) 등을 말하며 그는 "영화라는 걸 매개로 두 가지 이상의 문화를 연결하는 창작자들"이라 표현했다.
현재 밴쿠버영화제는 크게 열세 개의 섹션에서 서로 다른 개성의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커티스 수석프로그래머는 이 중 몇 가지를 꼽아 소개했다. 국제 부문에 해당하는 '뱅가드 섹션'은 전통적인 극영화를 상영하고, '스펙트럼' 섹션에선 단순 다큐만 아니라 에세이 형식에서 아카이브 형식, 표현주의나 실험적 성격의 논픽션 작품을 상영한다. 캐나다 신인 감독들이 대상인 '노던 라이츠' 섹션, 그리고 지역성과 영화를 접목한 영화를 상영하는 '포커스' 섹션이 있다.
"작년 영화제만 놓고 보면 초청작 중 절반 가량이 신인 감독의 영화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창의적인 영화인들이 활발하게 태어나는 축제라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14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노던 라이츠 섹션을 개인적으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또 '리딩 라이츠'(Leading Lights)라는 섹션이 있는데 여기선 세계 다른 영화들이 캐나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조망한다. 이처럼 다방 면에서 국제적인 영화들과 캐나다 영화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밴쿠버영화제 또한 여러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커티스는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생계를 위해 가욋일을 하기도 한다"며 "물가 상승으로 창작자들이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코로나19 팬데믹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그 기간 중 만들어진 작품이 거의 다 나오는 시점이거든. 이제야 팬데믹 이후 상황에서 영화계 흐름이 어떻게 될지 보기 시작한 느낌이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라는 인물로 북미 지역 불확실성이 커진 것도 일종의 위기다. 그래서 제가 도전이라 얘기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수단을 찾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 경우 이미 팬데믹 때 한 차례 조직 슬림화를 진행했다. 영화제 규모나 인력을 줄였는데 지금의 영화제를 지속하기 위해선 더 이상 조직이 작아질 순 없는 상황이다. 오래 일하신 분들이 은퇴하면서 새 프로그래머들을 등용하고 있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영화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깊게 탐구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지금의 프로그래밍이다."
커티스 월러스척 수석프로그래머는 "이런 상황에서 기회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국가간공동제작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캐나다와 한국 간 문화 교류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실제로 양국의 감독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고도 들었다. 공동 제작은 재원 및 자원 확보 차원에서도 긍정적이고, 각국으로 배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영화제 차원에서 마련한 여러 인더스트리 프로그램이 있는데 영화 관계자들이 활발하게 논의해주시길 기대한다. 제 전문은 영화를 프로그래밍하고 소개하는 일인 만큼 그 분야에서 계속 고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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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 위기... 독립영화인들, 생계 위해 가욋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