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었다. 자살이다.

건물 지하실 창고 비슷한 공간에서 살던 그를 발견한 건 오르솔랴와 그녀가 대동한 헌병들이다. 헌병들은 이내 조치를 포기하지만 오르솔랴는 그 가슴을 한참이나 계속 눌렀다.

사건이 있기 삼십 분 전, 오르솔랴는 사내를 만났다. 그에게 건물을 비워달라고, 퇴거를 요청했다. 그녀로선 제법 신경 쓴 조치였다. 명령은 이미 한 달 전에 떨어졌던 터였다. 추운 겨울을 피해 기관에 이의를 제기해가며 한 달을 늦춘 터였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클루지의 법원 집행관인 그녀에겐 11월부터 3월까지는 퇴거를 집행하지 않는단 원칙이 있었다. 영하 수십도까지 떨어지는 루마니아의 겨울은 길에서 나기엔 너무나 혹독했으므로.

일은 잘 풀리는 듯 보였다. 강제개방 없이 사내가 스스로 문을 따주었고, 잠시만 기다려주면 짐을 빼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나. 폭력을 쓴다거나 자해를 할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헌병들과 나가 커피를 마시고 돌아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그가 죽어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전주에서 만난 올해 최고의 영화

< 콘티넨탈 '25 >는 올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다. 한국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루마니아 출신 감독 라두 주데의 신작으로, 직접 연출은 물론 각본과 제작까지 감당한 작품이다.

영화의 구성은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특징적이다. 하나는 10여 분에 이르는 제법 긴 오프닝 시퀀스를 주인공이 아닌 인물에게 할애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기승전결의 전개보다는 주인공과 주변인의 대화를 병렬적으로 이어붙였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이점은 모든 이야기가 종료된 뒤 영화의 배경인 루마니아 클루지의 거리를 찍은 사진을 한 장씩 각 몇 초 간 연달아서 띄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곧 죽을 어떤 이의 하루로 시작하여, 그의 죽음에 부담을 안게 된 주인공의 대화들로 채웠으며, 마침내는 루마니아의 곳곳을 내보인단 것, 그것이 이 영화 < 콘티넨탈 '25 >다. 그 모두가 감독의 철저한 의도 아래 기획됐으며, 마침내 의도한 꼭 그만큼의 성과를 이뤄낸단 점은 이 영화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를 증명해낸다.

콘티넨탈 '25 스틸컷
콘티넨탈 '25스틸컷JIFF

강제퇴거 앞둔 노숙자의 죽음

누추한 행색에 어딘지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를 가진 듯한 사내(가브리엘 스파히우 분)가 산길을 걷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산 속 오솔길은 물론, 시내 이곳저곳을 걸으며 페트병을 주워 모은다. 시종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며 돈 있어 뵈는 사람들에게 직업을 달라거나 돈을 달라고 구걸하기도 한다. 이따금 그에게 지폐를 건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모른 척 외면하기 일쑤다. 어찌됐든 그는 걷고 또 걷는다. 루마니아가 아니라 서울 어디에도, 파리며 런던, 뉴욕에도 있을 법한 도시 빈민, 노숙자의 모습이다.

한동안 그의 하루를 뒤따른 영화가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진짜 영화의 시작점이 된다. 앞서 적은 죽음, 그에 앞서 이뤄지는 퇴거통보다. 성과랄 것은 얼마 없었으나 바쁘게 보냈던 하루 끝에 청한 단잠을 깨운 건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이들이다. 주인공인 오르솔랴(에즈터 톰파 분)와 그가 대동하고 온 헌병들이다. 오르솔랴는 이제 그가 집을 나가야 한다고 통보한다. 쉼터 정도는 알아봐줄 수 있다며. 그러나 그는 쉼터엔 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결코 평탄치 않은 그의 위태로운 평안이 그렇게 깨어진다.

사내의 정체는 그가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밝혀진다. 62살의 남자는 전직 운동선수로 발칸대회에선 우승까지 했던 이력이 있다고. 헝가리 출신인 그가 노숙자로 전락하기까지는 술과 도박에 중독된 사실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그에겐 전과까지 하나 있다는데 추위를 피하려 묘지에서 십자가를 불쏘시개로 썼다가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기소됐던 모양이다. 오르숄라의 직장 상사는 눈앞에서 마주한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진 그녀를 다독이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아무렇게나 풀어놓는다. 그 정도면 할 만큼은 한 거라고.

콘티넨탈 '25 스틸컷
콘티넨탈 '25스틸컷JIFF

한국에서 마주하기 어려운 이야기

매력적인 개막작 < 콘티넨탈 '25 >가 너무나 훌륭하여 이 영화를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단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쩌면 이 영화가 끝끝내 한국 관객에게 닿지 못할 거란 암울한 생각도 든다. 한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루마니아,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접점이 없는 탓에 그곳으로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 또한 낯설기 때문일 테다. 영화제에 걸린 다른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를 수입해 한국에 개봉토록 할 배급사는 끝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번 상영이 영화를 볼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의 드물기 짝이 없는 탁월함에도.

이 영화에 대하여 나보다 더 작품을 잘 설명할 이를 찾아 의견을 구하였다. 문화의 도시라 부를 만한 전주엔 각별히 영화를 애정하는 이들이 살고 있고, 나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이를 잘 알고 지내는 터다. 매해 영화제 기간마다 전주국제영화제 오픈카톡방을 운영하는 '전북전주영화모임방' 운영진 조성민씨가 바로 그다. 연간 한국에서 개봉하는 작품의 3할 정도는 챙겨 본다는 대단한 영화마니아로,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나는 그를 가장 먼저 찾아 영화제며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던 터다.

조성민은 <콘티넨탈 '25>에 대해 "주인공 오르솔랴는 자신이 법을 집행한 공무원일 뿐이지 않느냐는 주변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며 "내가 한 일이 옳았는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타인의 삶을 판단하고 강제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가 스스로에게 묻는 이러한 질문들이 개인의 내적 갈등을 넘어 루마니아 사회, 나아가 전 지구적 현실의 구조적 문제로 확장되는 게 이 영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주택 위기, 민족주의, 인종차별 등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뿌리박힌 갈등이 드러나는데, 특히 오르솔랴가 헝가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본질과 무관한 악의적인 공격을 받는 장면이 루마니아 사회의 민감한 화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영화는 지역적 문제를 넘어 전 지구적 현실로까지 시선을 확장하여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의 고통, 난민 문제 등 2025년 인류의 현주소를 감독의 예리한 시선 아래 날것으로 제시한다"고 평가했다.

콘티넨탈 '25 스틸컷
콘티넨탈 '25스틸컷JIFF

관객이 스스로 묻도록 한다

< 콘티넨탈 '25 >를 보고 난 관객들은 한 노숙자의 죽음과 이후 이어지는 오르숄라의 삶을 그저 루마니아 한 도시 누구들의 이야기로만 여길 수 없다. 영화가 이야기를 닫힌 보일러실 너머로, 개인과 그 지인들 사이 너머로, 도시와 국가의 경계 너머로 확장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노숙자와 그들에게 주거를 허하지 않는 오늘의 체제를, 평범하고 선한 공무원들이 지탱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의 현실과 이어진다.

조성민은 "두 시간 가까이 가만히 인물들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클루지의 건물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는데 이러한 전환은 개인의 이야기가 더 큰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며 "클루지의 건물들은 단순한 도시 풍경이 아니라 주택 위기, 계층 갈등, 민족주의로 얼룩진 트란실바니아의 역사와 현재를 담고 있는 구조물들로, 카메라가 건물들을 비추는 것은 개인의 고통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도시와 사회의 구조적 현실 속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이는 오르솔랴의 죄책감이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책임의 일부임을 암시하는데, 노숙자의 보일러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콘티넨탈 호텔이 들어선다는 설정은 도시의 재개발이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밀어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도시,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의 결과를 비춘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에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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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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