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부터 5월 25일까지 총 33회 공연되는 1인극이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총 33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배우 한 명이 단 한 회차만 공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우는 대본을 먼저 읽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리허설도 없으며, 연출가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대본을 받아 들고, 관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본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연극인 셈이다. 이 실험적인 연극의 이름은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이란 출신 작가 낫심 술리만 푸어가 2010년 대본을 쓰고, 이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으며, 올해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연극 자체의 실험적인 설정도 화제를 불러 모았지만,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이름 역시 뜨거웠다. 연극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해온 굵직한 배우, 연극과 드라마·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배우,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대중과 친밀하게 소통해온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박정자, 남명렬, 이석준, 김다현, 이시언, 김재욱, 원태민, 최정우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의 이름을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를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온 인지심리학자 김경일도 출연진 라인업에 포함되었으며, 5월 6일 이미 공연을 마쳤다.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은 다가오는 25일까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33회에 걸쳐 33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실험적인 1인극으로, 출연 배우는 다음과 같다. 박정자, 박상원, 남명렬, 송옥숙, 김경일, 이건명, 이석준, 박호산, 오용, 홍경민, 하도권, 박기영, 지현준, 김동완, 김다현, 최영준, 임강성, 이시언, 박혜나, 이엘, 김찬호, 김재욱, 정동화, 주민진, 최연우, 한지은, 박정원, 송유택, 강형석, 원태민, 최정우, 문유강, 김도연.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33회에 걸쳐 33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실험적인 1인극으로, 출연 배우는 다음과 같다. 박정자, 박상원, 남명렬, 송옥숙, 김경일, 이건명, 이석준, 박호산, 오용, 홍경민, 하도권, 박기영, 지현준, 김동완, 김다현, 최영준, 임강성, 이시언, 박혜나, 이엘, 김찬호, 김재욱, 정동화, 주민진, 최연우, 한지은, 박정원, 송유택, 강형석, 원태민, 최정우, 문유강, 김도연.브러쉬씨어터

삶과 죽음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

필자는 5월 5일 배우 김다현이 출연한 회차, 5월 10일 배우 최정우가 출연한 회차를 관람했다. 관람 회차와 출연 배우를 밝히는 이유는 배우 한 명에게 오직 한 회차만 허락된다는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의 설정, 따라서 매 회차마다 '같지만 다른 공연'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필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실험적인 작품을 처음 접하는 설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배우와 덩달아 필자도 긴장됐다. 지금 이 순간 대본도, 무대도, 관객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지 상태의 배우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는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했다. 그 어떤 공연이라 할지라도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의 배우만큼 등장부터 박수를 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무대에 오른 배우는 베일에 싸인 대본을 건네받고, 관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본을 읽어나간다. 객석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무대 구조 탓에 배우는 그 무엇도 감출 수 없고, 그야말로 모든 게 노출된 채 서있다.

대본을 읽으며 연기를 할 때에도 본인이 대체 어떤 극을 연기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바로 다음에 이어질 상황이나 대사도 알지 못하고, 당연히 결말도 모른다. 문득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이 한 인간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순간은 곧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축복과 환호가 빗발친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상에 발을 디딘 한 인간은 실험극의 배우와 같다.

한 인간, 그리고 한 배우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점철되지만,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을 따르면서 안정을 좇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을 삶과 죽음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로 읽어내도 무방하리라 생각했다.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포스터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 포스터브러쉬씨어터

순응과 복종

삶에 대한 거대 서사에서 집중적으로 봐야 할 키워드는 바로 '순응'과 '복종'이다. 앞서 말했듯이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안정을 찾기 위해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을 따른다. 왜 필요한지 이해하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규칙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규칙도 있다. 왜 이런 규칙이 생겨났는지, 과거의 규칙이 왜 현재에도 적용되는지 이해하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렇게 지금 이 시점에서 무효한 규칙을 따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연극은 그 자체로 배우와 관객에게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배우는 대본을 따라야 하고, 대본에 따라 관객에게도 특정 행위가 요구될 경우 관객은 이를 따라야 한다. 대본의 지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배우와 관객은 따라야 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구조적 특성도 순응을 요구하지만,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이 그려내는 각종 상황 역시 순응에 관해 이야기한다.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의 대본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규칙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존재를 은유한다.

설령 그 규칙이 제3자인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무의미하고 전혀 납득하기 어려운 규칙이라 할지라도, 에피소드 속 존재들은 그 규칙을 따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관객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섬뜩해진다. 대본을 쓴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는 극장에 없지만, 대본을 통해 자신의 궁금증을 고백한다. 배우의 입을 빌려 우리가 어디까지 순응하고 있는지, 복종의 한계가 어디인지 묻는다.

작가의 생애를 알고 나면 작가의 궁금증과 연극의 키워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이란의 강제 군 복무를 거부한 대가로, 즉 규칙에 순응하지 않은 대가로 여권이 폐지되어 외국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을 썼다. 작가의 처지와 이란의 사회·정치적 상황은 배우의 입을 통해 간간히 설명된다.
공연 연극 화이트래빗레드래빗 낫심술리만푸어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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