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하루를 계획표처럼 살아냈다.

기상 시간, 식사, 일과, 운동, 휴식까지 구글 캘린더와 다이어리 속에 나의 일정은 항상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정해진 틀 안에 나를 눌러 담고 나면, 마치 하루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틀에 얽매일수록 마음은 더 예민해졌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거나, 계획이 조금만 어그러져도 그날 전체가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예고 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에도 긴장이 됐고, 계획이 틀어지면 마치 하루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나는 왜, 이토록 빈틈없이 살아야 안심이 되는 걸까.

계획이 어그러질까봐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덮기 위해 더 많은 계획을 세우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건 생산성도, 자기계발도 아니었다. 불안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문득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완벽한 하루란 정말 존재할까?'

혹은 우리는,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꽤 오래 고민하던 문제였다.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가 전하는 '완벽한 하루'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영화 '퍼펙트 데이즈’

제76회 칸 영화제에서 주연배우 야쿠쇼 코지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 아카데미상부터 세계 유수의 영화제까지, 조용하지만 깊은 파장을 일으켰다. '힐링 영화'라는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단순히 따뜻하고 정갈한 삶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인물의 내면과 삶의 균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진정한 완벽한 날이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나 역시 주변 지인들에게서 꼭 봐야 할 영화로 여러 번 추천을 받았다. 보기를 한참 미루다 우연히 조용한 카페에서 점심을 먹던 날, 문득 이 영화가 떠올라 감상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한동안 잊고 있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누리고 싶었던 날이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작은 취미가 주는 위로

영화는 잔잔했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허름한 방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본업인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단골 가게에 가서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쩌면 고되고 반복적인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즐거움도 있다.

그는 중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편의점에서 사온 점심을 먹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한다. 매일 조금씩 진전되는 화장실 이용객과의 빙고 게임은 일과 중의 작은 재미다. 주말이면 책방에 가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단골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디지털 속도'에 지친 우리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으라는 무언의 초대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보며 문득 이건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속도에 떠밀리듯 살아가며 방향조차 잊은 일상 속에서, 이토록 느리고 고요한 삶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잔잔한 연못에 일렁이는 파동

그의 삶은 잔잔하지만은 않았다. 함께 일하는 철부지 동료 타카시는 늘 여자친구 아야에게 정신이 팔려 돈이 부족했고, 히로야마에게 빌린 돈을 갚지도 않은 채 갑작스레 일을 그만둔다. 히로야마의 테이프를 몰래 아야의 가방에 넣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다시 그를 찾아오고, 아야는 고맙다며 뜻밖의 볼뽀뽀를 남기고 떠난다. 어느 날에는 가출한 조카 니코가 불쑥 찾아와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불편한 동거가 잠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순간들은 조용하던 히로야마의 세계에 들어선 작고 어설픈 소동들이 된다. 연못처럼 고요하던 그의 일상에 파동이 일고, 평온하게만 보였던 삶에도 균열이 생긴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감정의 물결이 천천히 스며든다.

하루에는 외부의 충격이 전혀 없을 수 없고, 때때로 흔들림도 스며드는 날이라는 걸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알려준다.

코모레비처럼, 찰나에 머무는 용기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영화 '퍼펙트 데이즈’

영화의 마지막, 히로야마는 단골로 드나들던 선술집 주인의 전남편이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물 토모야마와 대화를 나눈다.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토모야마의 한탄에, 히로야마는 "지금 해보자"며 그를 조명 아래로 데려가 그림자 밟기 놀이를 제안한다.

중년을 훌쩍 넘긴 두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서로의 그림자를 밟는다. 무겁고 쓸쓸한 대화 끝에,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장면이 펼쳐진다.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의미를 찾지 않아도, 그저 함께 웃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

모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코모레비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코모레비의 영상이 흐른다.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우리가 늘 지나쳐온 찰나가 얼마나 빛나는지를 보여주는지 환기시키는 장면이다.

히라야마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코모레비처럼, 순간과 찰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에 집중하라는 말,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 어쩌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그의 대사처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을 둘러보게 한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퍼펙트'한 날들

<퍼펙트 데이즈>는 잔잔한 힐링 영화 그 이상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는 따뜻한 창이 되고, 삶의 틈새마다 스며 있는 균열을 정면으로 보여주며 말한다. 그 결함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지금 눈 앞에 놓인 것들에 집중하라고.

완벽한 하루란 예측 가능한 일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기치 않은 흔들림까지 포용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일상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스쳐가는 순간들을 껴안는 하루. 그렇게 불완전함을 품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진짜 '퍼펙트 데이즈'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하루의 틀이 깨지는 순간들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무너졌다고 느꼈을 작은 변수들 앞에서, 이제는 한 걸음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할 일이 쌓여 있어도 산책을 나가고, 예고 없이 생긴 일정 변경에도 마음을 연다. 누군가 갑자기 연락해도 '계획이 없어서 좋다'며 기꺼이 따라나선다. 피곤한 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도, 더는 나쁜 하루의 증거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배워간다. 반복되는 일상은 삶을 지탱해주는 단단한 틀이지만, 그 틀에 생기는 균열과 예기치 못한 순간까지 끌어안을 때 비로소 완전한 하루가 된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한 날. 그런 날들이 쌓여갈수록, 나는 진짜 '퍼펙트 데이즈'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영화리뷰 퍼펙트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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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재미있는 게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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