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날드 로즈의 대표작이자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개막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는 소년을 둘러싸고 12명의 배심원이 죄의 유무를 논의하는 과정을 그린다. 편견과 왜곡, 확신과 의심이 교차하는 치열한 논쟁은 민주주의 사회의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듯하다.

류주연 연출이 이끄는 극단 산수유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10주년을 기념한다. 2016년 당시 월간 한국연극이 선정한 '공연 베스트 7'에 선정되고, 공연과 이론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과 울림 있는 메시지를 인정받은 바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5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세명대학고 민송아트홀 2관에서 공연된다.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짝수일에는 A팀이, 홀수일에는 B팀이 공연한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극단 산수유

우리는 어떤 시민이어야 하는가

재판 과정을 지켜본 배심원 12명이 평결을 위해 한 방에 모인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소년의 죄의 유무를 판별하기 위함이다. 우선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와 증언들은 모두 소년을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고, 배심원들도 소년의 범행을 확신하는 분위기다. 몇몇 배심원은 소년을 향해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평결의 원칙은 12명의 만장일치다. 배심원들도 서로의 분위기를 확인하며 평결이 빠르게 종료되리라 예상한다. 무난히 소년의 유죄로 결론이 날 듯하다. 그렇게 별다른 논의도 거치지 않고 배심원들은 투표를 시작한다. 유죄를 확신하는 배심원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동료 배심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잠깐, 8번 배심원이 "무죄"라고 말한다.

11 대 1의 상황. 소년이 유죄라고 판단한 11명의 배심원들은 8번 배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죄를 확신하는 다른 배심원들과 달리 8번 배심원은 무죄를 확신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유죄라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죄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만약 자신마저 유죄 의사를 표하면 소년은 곧바로 사형을 당할 것이기에 유죄에 손을 들 수 없었다는 8번 배심원은 자신의 결정이 갖는 책임과 의미를 인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구체적으론 법정에서 진행되는 배심원들의 평결을 그려내고 있지만, 이를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으로 확대해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배심원 12명은 각기 다른 배경과 사회적 지위, 세계관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의 공론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듯 법정에 모인 배심원들도 고유한 특성을 보여준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극단 산수유

그중 8번 배심원이 보이는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볼 만한 모범이다. 그는 자신이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발생하게 될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비록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나 손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태도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시선으로 주어진 정보들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인다.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들에 오류는 없는지, 증언이 왜곡되진 않았는지 찬찬히 살펴볼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소년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증거들, 유죄를 확신하는 배심원들에게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항변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의심하되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8번 배심원은 음모론자와 다르다. 또 반론을 허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 수정할 태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독선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8번 배심원은 민주 시민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연극이 그려내는 민주주의의 규칙들

찬찬히 생각해보자는 8번 배심원의 제안에 불만을 드러내는 배심원들도 있다. 자신이 보기엔 소년의 유죄가 확실하니 불필요하게 시간 끌지 말자는 것이다. 7번 배심원은 야구 경기를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빠르게 평결을 끝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8번 배심원에게 가해지는 이런저런 압박은 현대 사회에서 소수파가 겪어야 할 압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애당초 느린 제도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자 하는 속도전의 유혹은 합의와 소수 의견의 가치를 묵살하기 쉽고, 이는 반민주적일 공산이 크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느림에서 가치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소수파라는 이유로 8번 배심원에게 힘을 실어주는 배심원이 등장하고, 시간을 두고 논의하자는 요청에 동조하는 배심원이 등장하며, 주어진 정보를 비판하고 의심하는 배심원들이 늘어간다.

일련의 과정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현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끝내 바람직한 논의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연극이 보여주는 논의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의 규칙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극단 산수유

먼저 모두에게 발언권을 보장하는 규칙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노인인 9번 배심원에게 누군가 무례하게 반응할 때, 다른 배심원들이 무례한 배심원을 강하게 제지한다. 그렇게 9번 배심원의 발언권을 보호해준다. 설령 입장이 다른 배심원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아울러 수적으로 열세하더라도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는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노력 역시 인상적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12명의 배심원들이 모두 번호로 불린다는 점은 상징적으로 읽힌다. 배심원 각각은 번호로 불리며 '단지 한 사람'이라는 의미만 갖는다. 이름이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더 대우 받거나 덜 대우 받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연극 속 배심원들은 모두의 발언권을 보장하고자 노력하지만, 발언권을 빼앗는 경우도 있다. 10번 배심원은 살인 의혹을 받는 소년이 빈민가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빈민가 사람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폭력적으로 내뱉는다. 그들에 대한 혐오가 어찌나 강렬한지 10번 배심원 스스로도 말을 하며 화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다.

곧이어 다른 배심원들은 10번 배심원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서 10번 배심원의 발언을 제지하고, 그를 논의의 장에서 배제하기도 한다. 이는 발언권을 빼앗는 경우이지만, 민주주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엘 지블렛은 충직한 민주주의자라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와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민주적이고 극단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을 공론장에서 고립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적 가치를 저해하고 정도를 넘어서는 주장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이처럼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논의와 합의의 과정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다양한 민주주의의 규칙들을 녹여 담아냈다. 한 소년의 죄를 가리기 위한 배심원들의 논의의 장을 넘어, 현대 사회의 공론장으로 의미를 확대해 작품을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공연사진극단 산수유
공연 연극 12인의성난사람들 레지날드로즈 극단산수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와 사회를 이야기하겠습니다. anjihoon_510@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