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이목을 끈 범죄 사건은 언제나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소재'가 된다. 범죄자에게는 그럴싸한 이야기가 주어지고, 범죄 당시의 장면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고려하지도 않고 자극적으로 연출·묘사된다.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드라마 <드롭아웃>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국을 뒤흔든 의료 사기극인 '테라노스 사건'을 다룬 본작은 극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윤리적인 접근을 시도해, 실화 각색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생각보다 강력한 무기, 시간 분배
▲드라마 <드롭아웃> 스틸컷
Hulu
<드롭아웃>은 손가락 채혈을 통한 피 한 방울이면 모든 질병 검사를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회사 '테라노스'와 그 창업주 '엘리자베스 홈스(아만다 사이프리드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중퇴하고 테라노스를 설립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뜻과 달리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채혈 기술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불완전한 기계로 사업을 확장하고 수많은 혈액 검사 결과를 조작하는 등 돌아올 수 없는 사기의 길로 빠져든다.
엘리자베스 홈스를 주연으로 내세운 만큼, <드롭아웃>은 당연히 해당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창업 이전의 엘리자베스가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자기 아이디어를 연이어 부정당한 엘리자베스가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로 변해 가는 과정 역시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드라마 속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에 몰입한 관객들은 자연히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드롭아웃>은 범죄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고통받는 인물에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숱한 '실화 기반 범죄 드라마'와의 차별화를 이룩한다.
본작의 러닝타임 절반이 엘리자베스 홈스와 그의 개인적 여정에 집중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고스란히 홈스의 주변인들을 조명한다. 작중 홈스의 멘토 겸 동업자로서 테라노스 창업에 열의를 보였던 화학자 '이안'은 과학자에서 사업가로 변모해 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상심하면서도 홈스를 끝까지 지지한다. 하지만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홈스는 이안에게 법적 책임을 뒤집어씌우기로 하고, 이는 이안을 자살에 이르게 한다. 관객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환호하다가도, 그로 인해 삶이 무너진 인물들을 통해 본작이 다루는 사건의 현실성과 중대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1대 1에 가까운 시간 안배가 극의 중심을 잡아 주고 있는 셈이다.
대안적 인물을 제시하다
▲드라마 <드롭아웃> 스틸컷Hulu
<드롭아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본작은 엘리자베스의 홈스가 저지른 사기극이 그의 관점에서 필연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성공에 대한 강박과 여성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그를 '마케팅의 갑옷을 두른' 고립된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엘리자베스 홈스의 사기극이 정당화되는 거냐는 물음에, <드롭아웃>은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다. 바로 대안적 인물을 통해서다.
<드롭아웃>은 실제 테라노스 사건의 내부고발자로 알려진 '에리카 청(캠린 킴 분)'의 캐릭터를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정의만을 좇는 투사'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중의 에리카 청은 테라노스를 미국 보건복지부에 고발할까 고민하면서도, 어렵게 얻은 직장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회사의 내규를 어기고 폭로를 이어갔을 때 실추될 자신의 명예를 걱정하기도 하며, 침묵을 지키고 사회적인 성공을 쟁취할까 갈등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작품의 초반 '여성 과학자'로서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엘리자베스 홈스와 평행선을 그리며 대조된다.
본작 속 에리카 청은 엘리자베스 홈스의 안티테제다. 홈스와 청은 각각 '입체적인 악인'과 '입체적인 선인'의 옷을 입고 나타나, 갖은 시련을 겪더라도 한 인물이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홈스와 비슷한 장애물을 마주하면서도 내부고발이라는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 에리카 청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엘리자베스 홈스의 모든 범죄가 엄연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작품의 주제 의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드롭아웃>은 희대의 의료 사기극을 실행에 옮긴 엘리자베스 홈스를 '선천적인 사이코패스'나 '마녀' 혹은 '괴물'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홈스의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또 홈스와 대립되는 인물인 에리카 청을 통해 홈스가 막연한 '시대의 피해자'로 그려지는 것을 저지한다. 이처럼 섬세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과감한 인물 묘사는 범죄자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 혹은 '알고 보면 불쌍한 피해자'라는 두 극단으로만 그려내던 실화 기반 범죄 드라마들에 경종을 울린다.
여성 범죄자를 다루면서도 흔해빠진 '여성혐오 레토릭'으로 빠져들지 않는 작품을 보고 싶다면, 그런 윤리적 세심함을 갖추면서도 수준급의 화면 연출과 극적 긴장감 조성으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디즈니+에서 <드롭아웃>을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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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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