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권을 두고서도 시간을 건너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시타(あした) 서림에서 1940년의 양희와 1980년의 해준이 만난다. 혼란한 시대 앞에 선 청춘들은 어떤 꿈을 꿀까.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의 이야기다.

작품 속 양희와 해준은 4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두 사람은 일본 제국주의와 독재 정권에 의해 자유를 뺏겨버린 청춘들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림에 숨는다. 양희는 서림의 주인으로서 독립운동의 자금책과 연락책을 맡고 해준은 학생들을 탄압하는 정권을 피해 서림에 숨어든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수레바퀴 아래서>, <제시의 일기> 등을 집필한 김하진 작가와 <라흐헤스트>를 작곡했던 문혜성 작곡가가 만들었다. 배우 박한근이 연출로 참여했다. 제작사 이모셔널씨어터가 자체 공연 지식재산권(IP) 개발 프로젝트로 발굴했다.

배우 이봄소리와 윤은오는 지난해 리딩 공연에 이어 참여한다. 양희 역에 이지수, 박새힘이 해준 역에 정욱진, 임규형이 합류했다. 제작사는 오는 11일 네이버TV를 통해 공연 실황을 중계하며 공연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언뜻 보면 양희와 해준은 다르다. 양희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 아버지에게 총과 화약 사용법을 배웠다며 직접 총독 저격에 나서려 한다. 그에 비해 해준은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대학 방송국 기자가 된 것도 선배를 따라서다. 그는 자신을 이끌어준 선배의 죽음 뒤에 절망하고 좌절한 채로 카메라를 집어넣는다. 양희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반면, 해준은 어제에 멈춰 있다.

'아시타 서림'은 불온함을 표출하거나 감출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불온함 속에서 피어난 양희와 해준의 이야기는 내일을 바라보던 청춘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억압을 피해왔을까에 대한 답으로 여겨진다. 의지를 불태우든, 무기력에 빠져 주저 앉든 계속해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은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내일은 성패와 상관 없이 온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넘버6 '소란스러운 밤' 장면. 왼쪽이 '양희' 역의 이지수, 오른쪽이 '해준' 역의 윤은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넘버6 '소란스러운 밤' 장면. 왼쪽이 '양희' 역의 이지수, 오른쪽이 '해준' 역의 윤은오.한별

양희와 해준은 책을 통해 대화한다. 40년의 시간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희는 서림에서 만난 청춘 남녀의 로맨스를 쓰는데, 여자가 폐허로 사라진 뒤의 남자의 심정을 서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연히 양희의 책을 발견한 미래의 해준은 양희의 소설을 '미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해준은 갖고 있던 펜으로 낙서하듯 메시지를 남기고, 이 낙서에서 양희는 실마리를 얻어 메시지로 화답한다.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은 양희에게 해준은 독립된 미래를 말해준다. 자유를 되찾았다는 말에 양희가 기뻐하자 해준은 독재로 인한 어두운 현실을 감춘다. 그러나 양희가 준비하던 거사의 결과를 알게 되자 진실을 말하며 그를 말린다. 하지만 양희는 실패할 거사에도 '당신의 내일을 위해'라며 나서고 해준은 선배를 떠올린다.

그렇게 해준은 양희를 끝까지 말리는 대신 그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본다. 해준의 낙서처럼 그의 카메라도 40년을 넘어 양희를 담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지만 이후 해준은 자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시작한다. 우선 해준은 아시타 서림의 이름을 '내일 서림'으로 바꾼다. '내일'을 꿈꾸며 서림 이름을 지었다던 양희의 뜻을 이어간다.

양희가 쓴 소설 '서림 로망스'는 해준이 대신 발표한다. 그 후 해준이 독재 정권에 맞서는 '기자'가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해준이 그 스스로의 삶을 되찾고 살아갈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만으로도 '해피 엔딩'을 짐작할 수 있다. 서림에서 피어오르는 로망스처럼 해준의 인생도 풋풋한 인연으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마지막 넘버 '서림 로망스 리프라이즈'에서 해준과 양희는 양희의 소설의 결말을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시대를 걱정하지 않고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사회, 결말 이후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게>의 사회가 그렇길 바랄 뿐이다.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개관작으로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넘버6 '소란스러운 밤' 장면. 왼쪽이 '양희' 역의 이지수, 오른쪽이 '해준' 역의 윤은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넘버6 '소란스러운 밤' 장면. 왼쪽이 '양희' 역의 이지수, 오른쪽이 '해준' 역의 윤은오.한별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게>는 이모셔널 씨어터의 개관작이다. 새롭게 리모델링해 개관한 공연장의 첫 작품인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큰 극장은 아니지만 가로로 넓은 무대가 탁 트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림이라는 이야기 배경에 알맞게 무대에는 책이 가득 꽂힌 서가가 늘어서 있다. 무대 양 사이드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극 중반 양희와 해준이 가져와 가운데에 놓는다. 다른 시대에 산다는 것을 알고난 이후니, 진실을 안 양희와 해준의 만남과 소통을 의미한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중 일부는 책등에 조명 장치를 달았다. 무대가 어두워지고, 책의 조명이 켜지면 마치 별들이 빼곡한 밤하늘처럼 보인다. 어두운 시대 행동하던 이들이 잘 보이지는 않아도 빼곡히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하는 소극장 무대의 특성상 무대 장치로 하여금 시선을 빼앗는 지점이 있기 마련인데, 그 부분이 잘 구현됐다.

극 후반부 양희와 해준이 이용하던 통로가 아닌 서가를 치우고 서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끝나고 해당 서가는 문이 된다. 고민과 방황이 끝나고 서림의 비밀스런 '판타지'가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 서림의 환상성은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서림이 될 뿐이지만 양희와 해준이 함께했던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뮤지컬은 극장의 첫 공연이다. 첫 발을 내딛는 공연으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설레는 시간일지 짐작이 간다. 창작 초연만이 주는 새로움과 설렘은 분명 가치있는 것이다. 더 많은 창작진이 각자의 꿈을 안고 관객들을 설득하고 위로했으면 좋겠다. 양희가 해준을 믿고 해준이 양희를 도왔듯이, 관객들은 창작진의 진심을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청춘들이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도록

공연의 배경인 1940년대와 1980년대는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누구나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설령 연도가 익숙치 않더라도 한국사 교육을 받은 성인이라면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 시기가 얼마나 암울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더욱이 전례 없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현재의 청년들 역시 계엄의 공포와 독재의 위험을 느끼게 됐다. 지금의 20대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로 친구들, 동년배의 죽음을 느껴본 바 있다. 그렇기에 양희를 막는 해준에게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학업 및 취업의 어려움으로 삶의 무기력을 느낀 청년들에게 양희는 내일을 향해 나아가라고 위로한다. 설령 지금 내가 '실패'를 향해 가더라도, 나의 실패가 누군가의 성공의 디딤돌이 된다면, 나의 희생으로 너는 조금 더 나은 오늘을 마주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명작은 고전으로 남는다. 여러 해 이어온 공연들은 그 시대상을 담아 후대에게 역사를 전달한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게>는 2025년을 배경으로 두지 않지만 2025년의 청년들을 기록한다. 훗날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갔음을 증명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필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a.star_see)에 취재 후기와 함께 공유됩니다.
소란스러운나의서림에서 뮤지컬 이모셔널씨어터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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