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다룬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의 제작자면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를 연출한 김옥영 감독.
제주 4.3을 다룬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의 제작자면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를 연출한 김옥영 감독. ㈜스토리온

<다큐멘터리극장>, <인물현대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큐프라임> 등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40여 년간 활동해온 김옥영 작가의 최근 행보가 수상하다. 지난 4월 2일 개봉한 다큐 <목소리들>의 제작자로 나선 데 이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의 감독으로 전면에 섰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다양한 직군의 스태프가 협업해야 하는 특성상 작가, 제작자, 그리고 감독을 넘나드는 예는 많지 않다. 지난 2일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인 영화의 거리 인근 카페에서 만난 김옥영 감독은 한창 밀려드는 인터뷰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처음 연출한 작품,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주요 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폐막작이 된 게 이례적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조명받지 못한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역할이 중요함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국가 폭력 4.3에 스러져 간 여성들

한국전쟁 직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폭정으로 발발한 제주 4.3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큰 비극 중 하나다. 1947년 경찰의 총기 발포를 시작으로 7년여간 이어진 제주도민들의 수난사는 단일 사건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참사기도 했다.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적 사과를 요구한 지 56년 만인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도민들과 유가족에게 정부의 공식 사과 입장을 밝힌 바 있다.

3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들 중 유독 여성의 이름은 가려져 있거나 지워져 있다. <목소리들>은 김은순, 고정자, 김용열, 홍순희 할머님 등의 증언을 토대로 제주 여성들이 국가가 인정한 희생자 범주에 들지 못한 현실을 짚고 이들의 남은 이야기를 전한다. 2005년 당시 광복 60주년 특집으로 기획된 KBS < 8.15의 기억 >를 준비하던 중 유독 기억에 남았던 한 할머니의 증언이 일종의 시초였다. 김옥영 감독은 "4.3 이야긴 무섭다고 안하시면서도 희생자 묘역에서 대성통곡하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며 설명을 이었다.

"2021년 본격 기획을 시작했는데 공부는 그 전부터 계속 해왔다.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현대사의 여러 주요 사건을 다뤘지만 제주 4.3을 해본 적 없더라. 구술사 다큐로 구성한 < 8.15의 기억 >의 마지막 편을 찍는데 그 할머님이 인터뷰에서 그렇게 서럽게 우셨다. 그러다 이후 어느 신문사에서 제주 마을 위령제 르포르타주를 실었는데 여자들 이름이 없다는 대목에 충격을 받았고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4.3 영화를 한다면 여자들 이야기를 하겠다 결심했고 이후 4.3평화재단에서 다큐멘터리 공모 사업에 지원하면서부터가 출발점이 됐다."

영화엔 자신들이 당한 폭력과 성적 학대 등을 떠올리기 힘들어하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지혜원 감독, 그리고 4.3 연구자로 오래 활동한 조정희씨가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는 데 일조했다. 구술 채록이라는 형식상 지난해 개봉한 <돌들이 말할 때까지>와 유사해 보이지만, 피해자들이 자신이 당한 일을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며, 가려진 여성 희생자들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했다는 데에 의의가 컸다. 제주 서우봉 사건, 토산리 사건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학살 사건의 진상 또한 <목소리들>에 담겨 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가 (수형인들을 중심으로 한) 재심 재판이 주였다면, 우린 좀 더 깊게 파는 쪽이었다. 문제는 직접 증언자가 없다는 현실이었는데 영화를 엎네 마네 하던 차에 표선리 토선면에 생존자가 계시다는 말에 테스트 촬영차 찾아갔다. 그분이 김은순 할머니였다. 그 일만 떠올리면 발작을 일으키신다고 그 아들이 많이 경계했다. 그래서 무리해서 증언하지 않도록 했고 그저 할머니의 일상을 찍게 됐지. 기존 4.3 다큐와 차별점이 생긴 게 김은순 할머니 덕이었다.

직접 증언은 안 하시지만 할머니의 반응 자체가 큰 재료였거든. 여성 성폭력 사례에 대한 직접 증언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 폭력을 밝힐까 고민하다가 논증 구조로 영화의 구성을 바꿨다. 무서워하면서도 말씀은 못하시는 모습을 통해 영화 끝에 과연 무슨 얘길 하실지 관객 입장에선 궁금하도록 했지.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씩 추론해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서우봉 사건이 토산리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였다. 그 자료를 하나씩 추적하다가 과거에 직접적으로 강간이란 단어를 언급하신 할머님의 영상을 찾게 된 과정을 넣었지."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의 지혜원 감독과 제작자 김옥영.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의 지혜원 감독과 제작자 김옥영.㈜스토리온

<목소리들>이 특별한 또하나의 이유는 영화의 배급 방식에 있다. 기존 배급사를 통해 유통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직접 극장을 여는 주체가 되는 시민 추진단을 구성한 것.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로 명명한 이 방식은 <수라> <괜찮아, 앨리스> 등의 영화가 택해 상당 부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소규모에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이유로 극장에서 상영관을 잘 안내주려 하기에 시민들이 직접 나서 극장을 대관해 상영관을 확보해가는 전략이다. <목소리들>은 이 방식으로 개봉 한 달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하게 됐다.

"사실 일반 개봉하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영화진흥위원회 개봉 지원 사업에 떨어지기도 했고, 기성 배급사들이 이미 라인업이 다 찬 이유도 있었다. 상황을 보니 일반 배급을 했을 때 홍보 방식도 뻔해 보였고 관객 수도 한 2, 3천 명 정도로 보시고 끝날 것 같더라. 그러다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를 하면 배급비용도 아낄 수 있고, 관객들의 자발성이 힘이 더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개봉당일 132개 상영관으로 시작한 <목소리들>은 개봉 2주차에 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극장 프로젝트 추진단들의 자발성으로 전국 곳곳에서 관련 행사들이 이어졌다. 시인이 중심이 된 시 낭독회가 열리거나, 사비를 들여 만든 기념 굿즈를 일반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제작자로서 김옥영 대표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이자 약자가 은폐되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마음임을 잘 알고 있다"며 "마치 그 극장들이 계엄에 항거한 시민들이 모인 남태령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주 노동자의 고단함과 시가 만나다

감독으로 나선 <기계의 나라에서> 또한 시와 영화가 만났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영화는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에 실린 네팔 노동자들의 시를 토대로 인간을 기계 부품처럼 여기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김옥영 감독은 2020년 무렵 시집을 접하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네팔에 소수민족이 많은데 한국에 온 노동자들의 문학단체만 6개라고 하더라. 그분들이 쓴 시를 보니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주노동자 하면 나와 직접 연관은 없기에 추상적으로 인식하기 쉽잖나. 그 시를 보면 한국사회, 한국인에 대한 정서가 담겨 있다. 굉장히 비판적인 시도 있는데 그래서 통렬한 직감이 왔고 그걸 영상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피고용자들이 부당함을 고발하는 건 직장 밖에서나 가능하다. 일하는 동안은 말하기 쉽지 않거든. 그 부당함을 입증하는 것 또한 노동자의 몫이기 마련이고. 출근 때 휴대폰을 압수하는 곳도 있고 그만큼 그들이 자신의 말을 하기엔 척박한 환경인데, 시로 말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바로 네팔 노동자들이 우릴 보는 시선을 가져온 영화라 할 수 있다. 일종의 미러링이지. 한국은 어떤 사회이고 한국인은 어떤 존재인가. 영화 제목 또한 그분들이 항상 하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계의 나라에서>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기계의 나라에서>의 한 장면. ㈜스토리온

효율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경쟁은 당연시되기 마련이다. 기술의 고도화로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결국 그 기술을 적용하고 기계를 운용하는 건 사람이다. 그 빈틈, 그러니까 기계가 놓치거나 기계가 미처 처리할 수 없는 공정을 값싼 대가를 받고 이주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김옥영 감독의 문제의식은 이주노동자의 기본권, 행복추구권을 제한하게끔 한 고용허가제의 위헌성에도 맞닿아 있었다. 사용자 동의 없이 사업장을 옮기지 못하게 하는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쓰고 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 김옥영 감독이 이 영화로 비판하는 지점이었다.

40년 경력에 첫 연출을 맡았기에 낯설 법했지만 편집까지는 그럭저럭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기 기획에선 감독을 고용했으나 제작 방향에서 이견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직접 연출을 맡은 경우였다. 문제는 후반 작업이었다. 영화에서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주요하게 쓰이는 만큼 음악이 중요했는데 김옥영 감독은 여기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두 편의 다큐로 올 상반기를 바쁘게 보내는 김옥영 감독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베테랑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여전히 산업의 변방 취급 받는 다큐멘터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 말이다. 그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큐 자체가 없어지진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기계의나라에서 김옥영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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