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천재'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결정체로 꼽히는 GPS, LED, 레이저, 핵무기, 태양전지 등의 다양한 발명도 아인슈타인이 정립한 이론을 기반으로 탄생했을만큼,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현대 과학계와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과학계의 톱스타' 혹은 '위대한 천재'로만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이면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사생활과 기행 등 의외의 면모들도 감추어져 있었다. 과연 우리가 아는 진짜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인슈타인의 은밀한 사생활

벌거벗은세계사 아인슈타인
벌거벗은세계사아인슈타인TVN

5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위인전엔 없는 아인슈타인의 은밀한 사생활'편이 그려졌다.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훗날의 천재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부모의 걱정을 자아내는 '금쪽이'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기형적으로 컸고, 세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으며, 말이 트인 후에도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 사이에서도 아인슈타인은 '바보'라고 불릴 정도였고, 그의 부모는 혹시 아이의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수수께끼를 풀거나 구조물을 만드는 놀이에 재능을 보였고, 주변의 소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5살에는 나침반을 처음 접하고 아무 힘도 가하지 않았는데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는 모습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천재다운 비범함을 드러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에도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중퇴한다. 하지만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큰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아인슈타인은 무려 21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대중을 위한 자연과학' 서적을 완독했는데, 이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과학이론 연구에 중요한 기초가 된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책을 읽으면서 당시 "숨을 멈출 정도로 몰입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7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 상태로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공대에 입학한다. 대학시절 아인슈타인은 훗날 첫 아내가 되는 4살 연상의 물리학도 밀레바 마리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아인슈타인에게 마리치는 단순한 연인을 넘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학문적 동반자' 관계였고, 두 사람은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키워갔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도 평탄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대학시절은 현대 물리학 연구가 갓 태동하던 시기였지만, 아인슈타인이 재학하던 취리히 연방공대는 여전히 뉴턴 중심의 고전 물리학 강의가 중심을 이뤘다. 이에 실망한 아인슈타인은 학교수업에 점점 불성실하게 임했고 스승인 교수들과 갈등을 빚는 문제아로 전락했다. 당대의 석학이자 아인슈타인도 한때 가장 존경했던 스승인 하인리히 베버와도 사이가 틀어지자, 교수님이라는 존칭도 생략하고 '베버 씨'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졸업후에도 미운 털이 박혀 교수들의 추천서를 받지 못해 일자리를 얻지못하고 한동안 취업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면서 스위스 특허청 심사관에 채용되며 공무원으로 마침내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지켜온 마리치와도 결혼에 성공하여 가정을 꾸렸다.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도, 훗날의 과학 역사를 바꾸게 될 위대한 논문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오늘날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처음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시공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요인으로 결정된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던 고전물리학에서의 기초적인 시공간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인류사에 대혁명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현대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GPS 기술,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에 있던 아빠와 지구에 있던 딸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설정 등도 바로 상대성 이론이 적용된 사례에 해당한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박사 학위를 받고 3년뒤에는 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어 30세의 나이에 취리히 연방공대 부교수로 임용되며 비로소 학자로서 뒤늦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학문적 성취나 사회적인 성공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아내 마리치를 두고 사촌인 엘사 로멘탈이라는 여성과 불륜 관계에 빠진다.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타면 상금을 전액 위자료로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마리치와 이혼하고 결국 40세의 나이에 엘사와 재혼에 성공한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의 바람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놀랍게도 본인의 의붓딸이자 아내 엘사의 친딸인 일제와도 불륜 의혹에 휘말렸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이니셜로 표시된 의문의 여성들과 은밀한 편지를 수차례 주고받았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하여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복잡한 사생활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현대 과학의 표준 중력 이론이자 천체물리학과 우주학의 기반이 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다. 중력은 공간을 뛰어넘는 물체 사이의 관계가 아닌 시공간의 휘어짐이라는 것이다. 이는 수백 년간 절대진리로 여겨져 오던 뉴턴의 중력 법칙을 뒤집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1921년에는 또다른 위대한 발견으로 꼽히는 광전효과로, 마침내 첫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어느덧 세계의 대중과 언론이 주목하는 과학계의 톱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는 전세계를 돌면서 과학 강연을 이어나갔고, 매번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렸다고 한다.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로 아인슈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관심을 받는 취재의 대상이 됐다.

아인슈타인 본인도 이러한 유명세를 상당히 즐겼다고 한다. 그는 근엄한 과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유머스러운 말투와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더 주목받았다. 스스로는 머리를 감지도 못해 늘 여성들이 대신 감겨줘야했 다는 부스스한 헤어스타일, 양말없이 맨발에 구두를 신는다거나, 양복 차림에 아내의 샌들을 신는 등, 독특한 기행과 패션 스타일로 대중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1931년에 아인슈타인이 할리우드를 찾았다가 당대의 영화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을 만나 나눈 대화도 유명하다. 과학계 톱스타와 무성영화계의 톱스타간 세기의 만남에서, 아인슈타인이 "당신이 하는 영화의 위대한 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칭송하자, 채플린은 "맞다. 하지만 박사님의 명성은 더 위대하다. 세상 누구도 당신이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모두가 존경하니까"라고 재치있게 응수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에게 찾아온 위기

1933년, 슈퍼스타로 승승장구하던 아인슈타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등장이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시민권을 반납하며 유대인을 탄압하는 히틀러를 강하게 비판했다. 나치의 박해와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아인슈타인은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핵무기 개발'을 촉구했던 행적은 훗날 논란이 된다. 당시 독일은 우라늄을 이용한 강력한 폭탄을 개발 중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위험성을 경고하며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편지는 미국의 사상 최초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된다.

정작 아인슈타인 본인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미국 육군 정보국은 독일 출신인데다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아인슈타인을 잠재적 위험인물로 분류하며 경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5년 미국은 결국 아인슈타인의 주장한 대로 완성된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한다. 대량살상무기의 위력을 처음 확인하고 경악한 이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핵무기 개발을 독려한 아인슈타인을 향한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당시 아인슈타인도 꽤나 큰 충격이었는지 원자폭탄 투하를 목격한 직후 "아, 슬프다'라는 짧은 한 마디만을 남겼다고 한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아인슈타인은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각종 사회 운동에 참여한다. 핵폭탄 개발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여생을 반핵운동에 헌신하는가 하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와 난민 구호 활동에도 참여했다. 1952년에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대통령직을 깜짝 제안받았으나 본인이 나이와 건강문제를 이유로 고사하기도 했다.

1951년, 72세의 아인슈타인은 생일파티를 마치고 지쳐있던 상황에서 사진기자의 계속된 포즈 요청을 받자 돌연 혀를 내미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장난스레 응수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대표적인 시그니처 표정이 된 '메롱'사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존경받는 천재 과학자의 인간적이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에 대중은 큰 호응을 보냈고, 아인슈타인 본인도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 76세의 나이에 복부 대동맥류로 세상을 떠난다. 전세계가 위대한 천재 과학자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사후에 뜻밖의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바로 '아인슈타인 뇌 도난 사건'이다.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아인슈타인의 부검을 담당했던 토마스 스톨츠 하비라는 인물은, 유족의 허락도 없이 아인슈타인의 뇌를 무단으로 반출하여 보관했고, 240조각으로 나누어 전세계의 과학자들에게 배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재의 뇌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의외로 아인슈타인의 뇌는 오히려 평균보다 가벼웠다고 한다. 지금도 과학계에서 아인슈타인의 두뇌구조와 천재성의 연관관계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본인이 남긴 격언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을 진정한 천재로 만든 원동력이란, 타고난 뇌의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벌거벗은세계사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천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