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로,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4대미녀'로 꼽힌다. 가공의 인물임에도 남자들 못지않은 지혜와 용기, 결단력을 두루 갖춘 초선의 매력적인 캐릭터와 드라마틱한 활약상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삼국지 팬들에게 회자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5월 6일 방송된 tvN STORY 역사 스토리텔링 <신삼국지>에서 '초선의 유혹과 조조의 서주대학살'편이 그려졌다.

악인의 대명사

 <신삼국지>중 한 장면
<신삼국지>중 한 장면tvN STORY

동탁은 후한 말의 군벌이자 권신으로 사실상 <삼국지>의 시작을 연 악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지방 군벌이던 동탁은 후한 조정이 환관과 외척의 권력다툼으로 혼란한 틈을 타 수도 낙양으로 쳐들어와 황제 소제를 폐위하고 꼭두각시 헌제를 옹립해 정권을 장악한 뒤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둘렀다.

이에 동탁 정권에 반대하는 지방의 군벌들은 '반동탁연합'을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조조, 유비, 원소, 손견, 원술 등 훗날 <삼국지>를 대표하는 주역들이 대거 참전했다.

동탁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반동탁연합군을 피하여, 수도인 낙양을 버리고 자신의 근거지인 양주(서량)에 가까운 장안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동탁은 반대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낙양의 부자들에게 반역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씌워 학살하여 재물을 몰수하는가 하면, 황제와 문무백관, 백성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장안에 이주시켰다.

조조는 단독으로 동탁을 추격했으나 상대의 매복에 걸려 막대한 피해만 입고 후퇴한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랐던 제후들 간에 내부 분열까지 일어나며 반동탁 연합은 결국 성과 없이 와해된다.

장안에 자리 잡은 동탁은 국정을 농단하며 더욱 횡포를 부렸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 동탁 정권의 학정이 지속되자, 이에 반기를 들고 동탁 타도를 위하여 일어선 인물이 왕윤이다.

왕윤은 후한의 권문세족 출신으로 영제부터 소제, 헌제까지 3명의 황제를 모신 거물 대신이었다. 연의에서의 왕윤은 조조에게 자신의 보검인 칠성검을 내주고 동탁 암살을 의뢰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한다. 조조의 암살이 실패하고 반동탁연합마저 무산되자 왕윤은 다시 동탁을 제거할 새로운 계획을 모색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 인물이 바로 초선이다.

초선은 단순히 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지혜와 용기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묘사된다. 연의에서 초선은 어린 시절부터 춤과 노래 실력이 남다른 것을 눈여겨본 왕윤이 가기(집안의 기녀)로 데려와서 수양딸로까지 삼았다는 설정이다. 초선은 동탁 때문에 근심하던 왕윤의 마음을 읽고 다가와 "아버님께서 소녀를 은혜로 기르셨으니, 만약 소녀를 쓰실 곳이 있다면 골백번 죽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먼저 당차게 제안한다. 이에 감동한 왕윤은 초선의 미모를 활용하여 동탁과 그 심복인 여포를 이간질하려는 '연환계'를 구상한다.

초선과 동탁-여포의 삼각관계는, 남성들의 권력다툼과 전쟁이 주를 이루는 연의에서 몇 안되는 여성이 중심에서 활약하는 에피소드이자, 현대판 막장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치정극'이다. 왕윤은 초선으로 하여금 먼저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게 만든 후, 이번에는 동탁에게 소개시켜 시첩으로 삼게 한다. 이에 여포는 동탁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원한을 품게 된다.

동탁은 초선과 여포가 자신의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는 모습을 목격했다. 격노한 동탁은 여포에게 달려가 창을 내던졌지만 여포는 재빠르게 피하여 도주한다. 초선은 대담하게 동탁과 여포를 번갈아 유혹하며 교묘한 언변을 통하여 두 사람을 지속적으로 이간질했다. 여포와의 밀회를 동탁에게 일부러 들킨 것도, 초선이 꾸민 계략의 일부였다.

동탁의 측근들은 두 사람의 파국을 막기 위하여 여포를 용서하고 초선을 내줄 것을 권유한다. 동탁은 처음엔 마지못해 이를 수락하지만, 초선은 눈물을 흘리며 "소첩은 이미 나리를 섬기는 몸인데 저를 가노(집안의 노비)에게 하사하신다니, 그런 모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라며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다. 마음이 흔들린 동탁은 황급히 자기 말을 번복하며 초선을 달랬다.

이로써 동탁과 여포의 관계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또한 왕윤은 망설이는 여포에게 "장군의 성은 여씨이고, 동탁의 성은 동씨외다"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동탁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부추기는 결정타를 날렸다.

왕윤은 동탁에게 제위를 선양한다는 황제의 거짓조서를 내려서 황궁으로 유인한다. 이에 방심한 동탁은 의기양양하게 황궁으로 입성했다가 왕윤이 매복한 군사들의 기습을 받는다. 다급해진 동탁은 급히 여포를 찾았으나, 갑자기 나타난 여포는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역적을 제거한다"고 선언하며 창으로 동탁의 목을 찔러 쓰러뜨린다. 동탁은 죽어가면서도 배신감에 여포를 욕하고 저주했다고 한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폭군이 초선의 권모술수에 농락당한 끝에 믿었던 측근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가공의 인물 초선

그렇다면 실제 역사는 어떨까. 초선은 연의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이 존재한다. 치정관계를 둘러싼 여포와 동탁의 갈등 역시 일부분 사실이다. 호색한이었던 여포는 동탁이 아끼던 시녀와 몰래 사통을 저질렀다. 또한 동탁은 성격이 강팍하여 조그만 일에도 분노하면 여포에게 창을 내던졌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의부자 관계였지만, 정작 동탁은 여포를 자신을 호위하거나 지저분한 일을 대신 처리하는 사냥개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여포 역시 주군인 동탁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동탁과 여포는 서로를 철저히 이용 대상으로만 여겼기에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없었던 관계였다. 왕윤은 그 빈틈을 노려서 여포를 이간질하여 동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정권을 거머쥐게 된 왕윤과 여포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과 곽사 등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다시 '제2의 동탁'이 된다. 여포는 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했고, 왕윤은 반란군에 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조조는 반동탁연합이 해체된 이후 연주(현재의 중국 허난성과 산둥성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자적인 군벌이 되어 세력을 확장했다. 조조는 점차 세력이 안정되자 고향에 있던 아버지 조숭과 일족들을 연주로 모셔 오려 했다. 하지만 서주 일대를 지나던 조숭 일행은 서주 태수 도겸의 부하인 장개의 습격을 받아 일족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연의에서 도겸은 조조와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조숭을 융숭하게 대접했고 장개에게 호위까지 맡겼다. 하지만 본래 황건적 출신이었던 장개는 조숭 일행의 재물을 보고 욕심을 내어 도적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도겸으로서는 호의를 베풀려다가 오히려 조조에게 큰 원한만 사 억울한 처지에 놓인 셈이다.

다만 <정사 삼국지>'무제기(조조)'에 따르면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동탁의 난을 당하여 낭야로 피난가다가 도겸에게 당했다'고 간략하게만 서술하고 있다. 도겸이 조숭을 직접 살해하거나 사주했는지, 아니면 장개의 단독 범행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조조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서주 침공의 결정적인 명분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는 원소, 여포, 이각과 곽사 등 강대한 군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조조의 입장에서 물자와 인구가 풍부하고 후방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서주는, 조숭살해 사건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노려야 했던 땅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서주를 침공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조조는 아버지의 복수를 내세워 서주 지역의 백성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정사 삼국지> '도겸전'에 따르면 '조조의 서주침공으로 수만 명의 백성이 죽고 시체로 강이 막혀 물이 흐르지 않았다"며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이 바로 조조 일생일대 최악의 악행으로 꼽히는 '서주대학살'이다.

서주대학살은 '여백사 일가족 살해사건'과 함께 조조의 잔혹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자, 훗날 그의 천하 통일까지 발목을 잡게 되는 최대의 정치적 실책으로도 꼽힌다. 서주대학살로 인하여 조조의 악명이 굳어지면서, 훗날 조조가 중원의 패자로 자리 잡은 이후에도 민심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지식인과 호족들을 중심으로 '반조조 세력'이 끊임없이 저항하고 결집하게 만드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훗날 삼국시대의 또 다른 축이 되는 유비와 손권 세력이다.

일각에서는 서주대학살이 조조의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연의에서는 '조조는 간웅이라고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이 여씨(여백사) 온 가족을 몰살하였다네. 이제는 제 식구가 모두 살해당했으니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돌면서 꼭 그대로 갚아주네'라며 백성들의 시선에서 조조를 평가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처럼 조조는 여백사 사건으로 오랫동안 지탄을 받아왔는데,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조숭 살해사건은 조조에게는 마치 자신이 저지른 짓을 그대로 돌려받은 '거울치료'같은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자신의 과오나 죄책감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조의 성격상, 애꿎은 서주 백성들에 책임을 떠넘겨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는 것으로 끝까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시각이다.

현대에 들어서 한때 조조를 악인에서 영웅이나 혁명가로 재평가하려는 시각도 연이어 등장했다. 하지만 서주대학살과 여백사 살해사건처럼 실제 역사에 기록된 조조의 잔인한 악행들도 덩달아 재조명되면서 이런 평가는 다시 역전되고 있는 추세다. 권력은 짧지만 권력자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준엄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다.
신삼국지 초선 조조 서주대학살 연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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