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등장하는 SBS 사극 <귀궁>에서는 안경이라는 물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녀이자 안경 기술자인 여리(김지연 분)가 드라마의 주무대 중 하나인 대궐로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자 여리의 첫사랑인 윤갑(육성재 분)이 임금의 안경을 만들어달라며 여리를 궁으로 데려간 결과다.
시력 나쁜 왕이 찾은 물건
▲드라마 <귀궁> 중 한 장면
SBS
임금인 이정(김지훈 분)은 시력이 나빠서 안경 쓴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여리는 자신이 임금을 위한 안경을 만들게 될 줄 알고 궁에 들어갔지만, 궁에서 막상 맞닥트린 상황은 그것과 달랐다. 왕족들의 몸에 빙의된 요괴들을 상대하는 일과 부닥친다.
이수광은 스물아홉 살 때 발발한 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유명해진 명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이 안경을 착용한 이야기를 <지봉유설>에 담았다. 그는 1563년에 왔다가 1629년에 떠났으므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을 생생히 겪은 세대다.
51세 때인 1614년에 <지봉유설>을 편찬한 실학자 이수광은 명종 임금 때인 1563년에 태어나 인조 임금 때인 1629년에 운명했다.
<지봉유설> 제19권에서 이수광은 "안경이란 것은 나이 든 사람이 책을 읽으면 작은 글자가 커지게 만든다"는 말이 소설류 서적에 나온다면서 "근년에 들어보니 천장(天將) 심유경과 왜승 현소는 모두 노인인데 안경을 써서 작은 책과 문자를 읽는다고 한다"는 말을 한 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본군과의 휴전협상을 주도한 명나라 장군 심유경이 '명장'으로 표기되지 않고 '천장'으로 표기된 건 이 시대 선비들이 중국과의 사대관계 때문에 명나라를 '하늘의 나라'로 대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장군 심유경과 일본 승려 겐소는 임진왜란 당시 50대 중후반이었다. 이 두 사람이 안경을 쓴 모습이 조선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안경방의 등장
▲Shop my photos at: https://creativemarket.com/nicolerosehoneysincerelymedia on Unsplash
이수광의 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임진왜란을 계기로 안경이 알려졌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지만, 임진왜란 62년 전인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편은 금방(金房)과 옥방(玉房) 등을 열거하는 대목에서 '안경방(眼鏡房)'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이런 상점이 한성부에 여러 개 있다고 기술한다.
후대의 인쇄 과정에서 안경점에 관한 내용이 추가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아는 안경점과 다른 상점을 말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임진왜란 훨씬 전부터 안경을 썼던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안경을 볼 수 없었다는 이수광의 언급을 감안하면, 앞의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안경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비슷한 기능을 한 물건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 2014년 제14권 제4호에 실린 윤을요 동덕여대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안경과 안경집 디자인 연구'는 "1세기경에는 네로황제가 에메랄드를 눈에 대고 검투사의 경기를 관람했으며, 이후 9세기 피르나스가 모래로부터 수정유리를 제작해 시력 교정을 위한 렌즈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런 내용을 알려준다.
"몽고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의 대제국 형성에 의한 서구와의 교역 확대에 대한 부분과 여러 가지 정황적 자료를 통해 현재의 안경이 발명된 것은 대략 1280년경이며, 본격적으로 시력을 돕는 도구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티모시 브룩 캐나다 브리티스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명나라 시대의 상업과 문화를 정리한 <쾌락의 혼돈>은 "1637년에 도착한 여섯 대의 유럽 상선은 3만 8421개의 안경을 중국에 가져왔다"고 기술한다. 이 정도만큼은 아닐지라도, 임진왜란 다음 세기인 17세기 조선에도 안경이 꽤 많이 퍼졌다. <문헌과 해석> 2006년 제35호에 실린 한문학자 백승호의 기고문 '조선 후기 사대부와 안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안경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질 만큼 사대부들 사이에 안경이 보급되었다. 송준길은 1660년 안경을 쓰고 직접 글을 고쳤으며, 남용익도 안경을 빌려 쓴 적이 있다. 이관징은 이현일에게, 이관징의 아들이자 이옥의 동생 이협은 이유장에게 각각 안경을 선물하였다."
지난 4월 26일 방영된 <귀궁> 제4회는 윤갑의 어머니인 영금(차정화 분)이 여리가 선물한 안경을 들어 보이며 "요새 이거 덕에 아주 바느질 헐 맛이 난당게"라고 신나게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안경을 바느질에 이용하는 여성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선비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많이 확산됐던 게 사실이다.
조선 후기의 안경에는 오늘날처럼 귀걸이가 달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귀걸이가 없는 안경은 돋보기 쓰듯이 손으로 들고 써야 했을 것이다.
위 논문은 "이관징이 이현일에게 선물한 안경은 오늘날의 안경과는 달리 귀에 거는 안경다리가 없었는데, 수십 년 뒤 이협이 안경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기술한다. 또 늦어도 18세기에는 근시용과 원시용이 구분됐다. "1742년경에 이미 근시용 안경, 원시용 안경이 있었음은 한원진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고 언급했다.
문서를 많이 읽는 직업 중 하나는 임금이었다. 오늘날의 대통령처럼 국가행정만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입법과 재판까지 관장했기 때문에 임금의 일과 중 상당 부분은 문서 읽기였다. 그래서 안경은 임금들에게 특히 필요했다.
주상 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음력으로 숙종 42년 1월 29일 자(양력 1716년 2월 21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45세의 숙종 임금은 "소싯적에 안경을 쓰면 되려 안 보였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때는 나이 든 사람들이 왜 이런 물건을 끼고 다니는지 궁금했다고 회고했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 보니 안경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안경 착용자가 상당히 많았다. 적어도 선비들과 임금들에게는 널리 알려지고 많이 사용됐다. 그렇기 때문에 <귀궁>처럼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는 안경 착용자가 종종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하루 종일 문서 읽는 임금, 사극에 '이 물건' 등장한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