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썬더볼츠* > 스틸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공허함과 외로움에 빠진 주인공은 옐레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썬더볼츠 멤버들도 그녀의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다. 캡틴 아메리카 방패를 빼앗긴 이후 아내와 아이와 별거 중인 존 워커, 정보 당국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쁜 고스트, 러시아가 만든 슈퍼 솔져이지만 리무진 택시 기사로 일하며 보드카에 절어 지내는 레드 가디언까지. 그나마 미 하원 의원이 된 버키가 예외지만, 그의 정신적 고통도 이미 전작에서 다뤄진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허함에 빠진 이유다. 바로 썬더볼츠 멤버들이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부품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들은 주인공들의 서사에 필요할 때 사용되고 버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MCU라는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이들. 국가에 의해서, 기관에 의해서, 기업에 의해서. 필요할 때는 부품으로 활용됐지만 가치가 다하자 폐기 처분된 이들이라는 것.
밥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는 썬더볼츠가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에 가깝다. 어려서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린 그는 목적 없이 살면서 삶의 의지도, 목적도, 희망도 잃었다. 우울증과 이중인격을 비롯한 여러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발렌티나의 실험은 돌파구였다. 어벤져스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력한 존재 '센트리'로 거듭나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을 기회였다.
그의 희망은 다시 한번 짓밟힌다. 본인이 창조한 영웅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하자 발렌티나는 그를 폐기해 버린다. 문제는 실험 과정에서 밥의 이중인격이 센트리보다 강력한 존재 '보이드'로 거듭났다는 것. 또 한 번 버려질 상황에 부닥치자 3차원 그림자처럼 생긴 보이드는 폭주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절망과 공허함 속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맨해튼 전체가 보이드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점령된다.
흥미롭게도 < 썬더볼츠* >는 현대적 맥락을 덧붙여 주인공들의 공허함을 집단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그들의 역경은 단순히 허구의 세계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인의 현실적인 일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 무한한 성장과 생산이 목표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한다. 개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활용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진다.
이처럼 무한한 생산성과 성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성과 사회'라는 형태로 구현될 때, 개인은 성과를 내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내적인 압박을 느낀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번아웃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고, 공허해지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곪아 버린다. 이에 더해 사회가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공동체적 맥락을 제거해 버리기에, 한 번 공허해진 현대인은 쉽사리 회복하지 못한다.
이는 정확히 옐레나가 겪은 일이다. 존 워커, 레드 가디언, 고스트, 그리고 밥이 경험하는 일상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그렇기에 보이드가 맨해튼을 집어삼키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어벤져스>에서 외계인이 뉴욕을 침공했을 때보다 더 섬뜩하다. 맨해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임을 고려하면, < 썬더볼츠* >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허함이 공동체 차원의 경험일 때 생기는 일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음이 병들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폭주는 이미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건을 비롯해 조현병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범죄 소식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즉, 센트리/보이드는 만화처럼 묘사됐을 뿐, 이미 실존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존재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테마파크에서 벗어나 시네마로 나아간다. 그림자에 삼켜진 맨해튼은 옐레나와 밥처럼 속으로 곪은 현대인들의 공허함이 우리 사회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만국의 현대인이여, 단결하라
그렇기에 썬더볼츠가 맨해튼과 시민들을 보이드로부터 구하는 방법도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와는 다르다. 작품의 클라이맥스가 주인공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발휘해 빌런을 무찌르는 액션 시퀀스로 구성되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보이드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보이드에게 제압당한 밥이 그를 집어삼킨 공허함으로부터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그 과정에서 각자의 공허함과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극복한다.
즉, 썬더볼츠는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함으로써 각자의 공허함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 썬더볼츠라는 새로운 가족과 삶의 의미도 발견한다. MCU에서 부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진 이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 새로운 목적과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것.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과소평가되는 공동체와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전개이기에, 파편화되고 부품화된 현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절 작지 않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조하는 클라이맥스는 팀의 이름이 썬더볼츠로 명명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썬더볼츠는 레드 가디언이 농담 삼아 붙인 이름이다. 옐레나가 데려온 멤버들을 본 뒤 그녀가 어릴 때 속했던 축구팀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 그러나 옐레나에게 썬더볼츠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알렉세이, 나타샤와 함께 지냈기에 혼자가 아니었고, 삶의 의미도 있었던 어린 시절을 일깨워 주는 이름이기 때문.
처음에는 레드 가디언의 말을 비웃던 다른 멤버들. 하지만 그들도 하나둘 자신들을 썬더볼츠라 지칭하기 시작한다. 옐레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썬더볼츠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발렌티나에 의해 '뉴 어벤져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지만, 여전히 썬더볼츠라는 명칭이 그들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썬더볼츠*>를 특별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스토리텔링은 후반부로 갈수록 빛이 바랜다. MCU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조각으로서 기능하는 과정에서 완성도에 금이 가기 때문. 일례로 많은 캐릭터 중 일부는 허망하게 소모된다. 극초반에 퇴장하는 태스크마스터가 대표적이다. 전작들에서 닉 퓨리를 대체할 흑막처럼 묘사됐던 발렌티나가 갈수록 개그 캐릭터로 전락하는 묘사도 일관성이 부족하기에 실망스럽다.
액션 연출도 시간이 지날수록 임팩트가 약해진다. 지하 저장고에서 처음 조우한 썬더볼츠 멤버들끼리 각자의 능력과 무기를 활용해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이나 오토바이를 탄 버키의 액션 시퀀스는 오랜만에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센트리 대 썬더볼츠의 액션씬도 부활한 슈퍼맨과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이 맞부딪히는 <저스티스 리그>의 장면을 오마주하면서 센트리의 압도적인 능력을 충분히 각인시킨다.
후반부에서는 액션의 쾌감이 약해진다. 밥의 내면에서 보이드가 만든 트라우마의 미로에서 탈출하고, 밥을 설득하는 식으로 클라이맥스가 구성되면서 액션씬의 비중이 덩달아 낮아진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각 캐릭터의 서사, 특히 옐레나와 밥의 감정선을 잘 따라간다면 뜻깊은 방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 원더우먼 1984 >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한 결의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MCU라서 인상적인 장면도 많다. 샘 윌슨이 재건한 어벤져스와 뉴 어벤져스 간의 갈등, 판타스틱 4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은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향한 기대감을 키운다. 버키와 고스트를 제외한 썬더볼츠가 멤버 전원이 페이즈 4 출신이라는 점은 비로소 MCU의 새출발을 선언하는 듯하다. 단지 < 썬더볼츠* >가 보여준 예상외의 스토리텔링에 담긴 함의가 다소 가려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영화 < 썬더볼츠* > 스틸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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