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2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개최된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겸 감독 이정현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말 미쳐 있는 소녀 같았다.'
15살이던 1996년 장선우 감독 <꽃잎>에 출연했던 이정현을 본 관객들 반응이었다. 당시 영화 촬영 중임을 몰랐던 마을 주민이 헤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이정현을 불러다가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는 건 영화계에서 이미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강렬한 데뷔를 알렸던 그가 배우가 아닌 대중가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15년이 지난 2011년에야 박찬욱·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으로 다시금 배우의 길을 걷는다.
배우 이정현을 2일 오후 전주영화제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돼 본인이 정한 6편의 작품을 영화제에서 상영 중이다. 대학원 재학 중 만든 단편 <꽃놀이 간다> 또한 초청돼 감독이자 배우·프로그래머 등 말대로 만능 엔터테이너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이정현의 능력이 빛을 발한 건 다름 아닌 영화제 게스트로 장선우 감독과 박찬욱 감독을 모신 데 있었다. 본인의 데뷔작과 배우 복귀작을 연출한 두 감독, 특히 장선우 감독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 위원으로 활동한 이후 이렇다 할 공식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2021년 제1회 힌츠페터국제보도상 수상자이자 <꽃잎> 촬영이기도 했던 유영길 촬영감독의 대리 수상으로 잠깐 무대에 섰던 게 최근 행적이다.
당시 임신 초기였던 이정현은 "토를 계속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던 때고 노산이라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힌츠패터보도상 진행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선우 감독님이 오신다기에 너무 뵙고 싶어서 갔다. 그때 정말 오랜만에 뵌 것"이라 당시 일화를 전했다. 그러면서 "이후로 또 보자고 하셨는데 못 뵈다가 이번에 제가 전화를 드렸고 흔쾌히 응해주셨다"고 덧붙였다.
이정현을 배우의 길로 이끌어 준 <꽃잎>은 미성년자였던 그에게도 힘든 기억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영화에 나온 제 상처들은 대부분 진짜 상처였다. 이후 가수로 데뷔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는데 사석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님께서 왜 연기 안 하냐며 저도 제대로 보지 못한 <꽃잎>을 영상자료원을 통해 DVD로 10장 구워오셔서 배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보면서 그때 소녀가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 역시 장선우 감독님이 거장이구나 깨달았다.
가수로 활동하다가 박찬욱·박찬경 감독님의 <파란만장> 이후로 많은 작품이 들어왔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소속사에서 저예산 영화라고 거절했는데 박찬욱 감독님께서 시나리오를 보시더니 왜 안하냐, 하라고 해주셔서 하게 됐다. 그 영화가 여기 전주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극장 개봉도 할 수 있게 됐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2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중부비전센터에서 개최된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기자회견에서 배우 겸 감독 이정현과 문석 프로그래머가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40대 되고 아이 낳으며 세상 보는 관점 풍부해져"
전주영화제 1회 때 홍보대사기도 할 정도로 영화제와 인연이 깊었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이정현은 <꽃잎>, <파란만장>,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복수는 나의 것>을 비롯해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아무도 모른다>를 선정했다. 여섯 작품 모두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1시간 만에 전석 매진됐다는 후문이다.
이와 함께 이정현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연기까지 한 단편 <꽃놀이 간다>도 영화제에서 화제였다. 지난 1일 첫 상영 이후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정현의 히트곡인 '와'를 오마주한 '와필름' 리더필름에 크게 호응했다고 한다. "직원이 저 혼자인 1인 제작사를 차렸다"며 이정현이 재치 있게 설명을 이었다.
"사실 대학생 때부터 연출을 전공했지만 가수 활동 중이었고 철이 없던 시기였다. 윤종빈 감독이 제 동기다. 그때 같이 수업도 듣고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는데 엄두를 못내다가 40대가 되고 아이도 낳으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풍부해진 것 같더라. 그러다 2년 전 창신동 모자 사건을 접했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은 그 소식에 가슴 아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감히 제가 그 사건을 건드리게 됐다. 모녀로 설정을 바꿔서 준비했는데 예산이 없어서 제가 제작부 막내일부터 하나하나 다 했다.
첫 상영 때 너무 긴장했는데 관객분들이 잘 봐주셔서 다행이었다. 제가 설립한 와필름 로고를 보고 관객분들이 빵 터지시더라. 그게 1999년에 나온 노래인데 잊히지 않고 여전히 명절 때면 나오고 종종 아이돌 가수 후배들이 불러주시는 걸 보고 사람들이 이 노랠 좋아하시는구나 실감했다. 아, <파란만장> 때 노 개런티로 출연했는데 박찬욱 감독님이 제 노래 '브이'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아주셨다. 그 뮤비가 3년 전부터 젊은 분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되더라."
따지고 보면 데뷔작 <꽃잎>을 비롯 그의 출연작 대부분이 사회 문제, 역사를 깊게 들여다보는 주제가 돋보인다. 차기 연출작을 묻는 말에 이정현은 사회 문제를 다룬 현실 영화가 될 것이라 답했다.
"제가 선정한 <더 차일드>도 <아무도 모른다>도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데 제가 그런 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판타지도 좋아하지만 사실적 이야기에서 더 큰 위로를 받는 것 같다. 어제 한 관객분도 그런 말을 해주셨다. 무책임한 어른을 다루면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다음 영화도 그럴 것 같다. 생활형 범죄를 저지르는 모녀 이야기다. 다음달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좋은 어른으로 살고 싶고, 제 영화들도 그렇게 주제를 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다. 20대 때는 사실 행복하지 않았다. 하루에 11개 이상 스케줄을 소화할 때도 있었다. 스캔들 하나에 나락으로 떨어질 때라 하고 싶은 연애도 못하고 일만 하며 지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 아이돌 후배들에게도 좋은 결혼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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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