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과> 스틸컷
영화 <파과> 스틸컷(주)NEW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파과>는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신성 방역에서 40년 간 활동 중인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이 노년이 돼 지키고 싶은 무언가에 흔들리는 과정을 담았다.

조각과 전혀 다른 온도로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의 시선도 교차한다. 20년 동안 조각을 쫓으며 드디어 조각을 만나 평생에 걸친 계획을 완성할 기회를 노리는 포식자의 태도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목숨 건 대결을 앞둔 긴장감이 퍽 구슬프게 들린다.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는 전설의 피날레

오프닝은 춥고 배고픈 시절부터다. 현재는 전설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퇴물로 전락한 60대 조각의 십대 시절로 거슬러 간다. 1975년 16세 조각이 손톱으로 불리게 된 까닭을 류(김무열)와 애틋한 사연으로 써 내려간다. 조각이 류에게 느낀 구원자, 보호자, 아버지, 스승 같은 마음과 투우가 조각을 떠올리는 복잡한 마음은 20년 공백을 지나 같은 선상에서 만난다. 이로 인한 투우의 분노와 질투, 애증 섞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돼 파멸로 몰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영화는 이혜영이 아니면 성사되지 않을 정도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목소리와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고정된 이미지가 조각의 인상과 일치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쇠함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국한하지 않은 상상과 해석이 이채롭다. <존 윅>의 몇 년 뒤, <길복순>의 노년까지도 어렴풋이 떠올리게 만드는 건 배우 자체의 아우라다.

나이 듦을 반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100세 시대 수명연장은 개인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노후의 행복은 신체적·경제적 여건이 충족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사치일 뿐이라는 게 쇠잔한 조각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모를 회환이 전해진다.

조각은 이미 쓸모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버틸 뿐이다. 약간씩 떨리는 몸, 깊게 파인 주름, 하얗게 세버린 머리카락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쓸쓸하고 외로운 길에 어느 날 지키고 싶은 게 생겨났다. 서서히 꺼져가는 인생에도 다시금 해야 할 일이 생긴 거다. 조각은 마지막 힘을 짜내 움직인다. 더디고 느릴지라도 실패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애쓴다. 그건 바로 세상의 쓸모를 알려준 류와 죽음을 애써 거두어준 강 선생을 향한 고마움이다.

제목 '파과'는 조각을 뜻하는 다중적 의미다. 여성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파과지년(破瓜之年)'에서 따온 말이다. '瓜(외 과)' 자를 분해하면 '八(팔)'이 두 개가 되고 '二八'은 16을 뜻한다. 살인청부업자 류를 만나 본격적으로 이 일에 발 들이게 되는 때다. 떠돌던 소녀가 여성이 되어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나이를 가리킨다.

파과(破果)의 또 다른 뜻은 흠집 난 과실을 말한다. 영화 속에 여러 캐릭터의 입으로 전해질 만큼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주변의 시선이자 부패해 버린 복숭아의 모습과 겹친다. 흠집은 났지만 더 맛있는 파과처럼 신체적인 노화, 나이 듦의 쓸쓸함이 정신적인 성숙과 비례하는 은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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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감독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시나리오로 옮기며 136번 변주를 줬다. 강 선생(연우진)의 성별을 바꾸기도 했고, 인물의 개별 전사까지 만들며 내밀한 접근법을 택했다. 그러던 중 인물의 독백 위주였던 원작으로 다시 돌아가 에센스를 따랐다. 원작을 읽어본 필자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이라는 생각이다. 영화가 흥행한다면 각 인물의 서사를 담은 스핀오프 시리즈로 보고 싶을 정도다. 그만큼 캐릭터의 힘이 센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원작의 긴 문장과 생경한 단어를 영상으로 구현한 이미지북의 느낌이 강하다. 절제된 표정과 말, 해야 할 일 앞에서는 서슴지 않고 터지는 액션이 관계성에 농밀하게 담겨 있다. 인연과 악연의 한 끗 차이를 냉철한 킬러들의 세계에 빗대 이야기하는 독특한 화법이다.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할 낯선 이야기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사회적 통념을 깬 인물을 중심으로 끌어와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조각을 바라보는 투우의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없이 깊고 진하다. 비극으로 얽힌 운명의 닮은 꼴이다. 이 관계는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된다. 마더 콤플렉스에 갇혀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자체다. 조각을 향한 투우의 시선은 집착, 흠모, 존경, 애증을 넘나들며 휘몰아친다. 종국에는 혼자만의 생각이 틀릴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멸해 버린 고독이 스크린 너머 전해진다.

내면 심리를 오랫동안 천착한 민규동 감독의 연출과 액션이 만나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이혜영의 내공에 밀리지 않는 김성철의 에너지가 스크린을 뚫고 추동한다. 어떤 역할을 맡겨도 자기 옷처럼 소화하는 탁월한 캐릭터 해석력을 지닌 배우다. 사랑, 질투, 증오, 존경의 복잡 미묘한 감정은 엔딩크레딧의 OST 가사에도 미쳐 마지막까지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이 곡은 김성철이 불러 애잔함을 남긴다.
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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