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엔진 고장으로 목적지가 아닌 일본 기타큐슈에 머물게 된 여행자들이 있다. 세 쌍의 서로 다른 승객들이 한 호텔을 배경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 <레이오버 호텔>이 제 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배우 안소희, 박정연, 정연주, 박예린, 박소진, 안동구 등이 출연한 가운데 세 번째 에피소드 'Unhappy Birthday'를 담당한 배우 박소진을 1일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의 거리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전날 저녁 소속사 식구들과 함께 전주 시내 한 맛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영화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박소진이 연기한 출판사 직원 김민희는 다소 냉소적이고 건조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물. 직장 동료와 함께 런던 북페어 행사를 준비하던 중 레이오버를 겪고, 뜻밖의 감정의 동요를 느끼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동료 배우와 대화하며 답 찾아가"
▲배우 박소진.
눈컴퍼니
연출을 맡은 최창환 감독의 전작 <여섯개의 밤> 또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 배우들이 이야기를 교차해 관통하는 구성이다. 소속사 식구기도 한 강길우 배우 응원차 당시 시사회에서 영화를 봤던 박소진은 내심 비슷한 형식의 영화로 제안이 오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사고 당일 태어나는 등) 매년 생일 때마 불행한 일을 겪은 민희라는 사람이 흥미로웠다. 옴니버스라는 형식도 호기심이 들었고, 불운을 통해 매순간 살아감을 느낀다는 게 재밌게 다가왔다. 북페어 여정에 레이오버하게 되면서 역시나 생일에 일이 잘못 흘러간다는 생각에 온갖 신경질이 나거나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인물로 해석했다."
아이돌 그룹 출신으로 가수 활동과 연기 활동을 병행해오던 박소진은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걸스데이 활동 중단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에 방점을 찍고 있는 그는 최근까지도 연기 공부를 하며 내공을 키워오고 있었다. 상대 캐릭터와 주고받는 감정이 중요했기에 박소진이 택한 방법은 현장에서 최대한 많이 대화하기였다고. 민희의 직장 후배 역의 안동구를 상대로 박소진은 계속 대화를 해나가며 해법을 찾아가려 했다고 한다.
"촬영 전 대본 리딩을 한 이후 기타큐슈 촬영 때부턴 촬영 전후로 시도 때도 없이 정말 많이 얘기했다. 그 시간을 기꺼이 투자해준 안동구 배우께 감사하다(웃음). 제가 보통 함께 호흡 맞추는 분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한데 이번 작품에서 뭔가 더 그런 게 필요했던 것 같다. 제가 이해한 신이 전부가 아닐거라 생각해서 상대 배우 시선이나 감독님의 관점 등을 자꾸 찾아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 해석해 낸 박소진의 김민희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경계와 선입견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며 자랐다는 생각, 세상에 환영받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에 남을 함부로 판단하기도 하는 것 같다"며 박소진은 "그래서 자기 마음을 내어주는 방법도 잘 모르고, 마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좋아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약 20여분에 달하는 에피소드에서 김민희는 무미건조했던 상태를 지나 후반부엔 환한 미소를 되찾는다. 그게 사랑의 힘일 것이다. 후배 직원의 고백에 서서히 마음이 열린 민희는 덥썩 손을 잡는 걸 거부하지 않는다. 박소진은 "그 장면이 가장 어려웠는데 민희라면 갑작스러워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며 제법 고민한 흔적을 드러냈다.
영화계에선 아직 낯설 수 있지만 이미 박소진은 TV 드라마론 꽤 두터운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최고의 결혼> <스토브리그> <행복의 진수> 등에선 잠시나마 환기가 되는 캐릭터였고, <보라! 데보라>나 <이로운 사기> <새벽 2시의 신데렐라> 등 근 2, 3년 전 작품에선 차츰 그 비중을 가져가며 배우로서 입지를 쌓고 있다.
2018년부터 경험한 연극 무대가 연기를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배우 진선규가 창단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를 비롯, 2021년엔 <완벽한 타인> 무대에 섰다.
"극단 '간다' 오빠들과 호흡하며 많이 배웠고 연기관이란 걸 정립해나갔던 것 같다. 마이즈너 테크닉(자신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 배우와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감정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법-기자 주)을 요즘 익히고 있다. 제가 이해하기론 연기하는 모든 감정과 모습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건데 저와 잘 맞는 것 같다. 진정한 나 사용법이랄까.
극단 경험 전엔 연기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저 대사를 잘 외워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지. 2018년 무렵 처음 연극을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연기적으로 각성했다랄까. 물론 연기를 전공하고 오래 해온 분들과 제가 쌓아온 시간은 전적으로 다르기에 그분들처럼 다 잘할 순 없을 것이다. 그분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저도 저만의 색이 있다고 믿는다. 제가 살아온 삶이 저만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레이오버 호텔>의 한 장면.눈컴퍼니
영화 <행복의 진수>(2019)를 시작으로 영화 현장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 요즘이다. <봄날> <제비> 등 소재와 주제를 달리한 여러 독립예술영화를 경험 중인 그는 "제게 딱 맞는 역할을 여전히 만나고 싶다"며 한껏 의지를 내보였다.
"한창 연기하는 게 재밌는 것 같다. 알면알수록 어려워서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재밌는 건 분명하다.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제비> 땐 현장 경험도 적고 감독님의 디렉팅을 소화하는 법도 잘 몰라서 3일을 내리 못 잔 채로 연기했다. 대본을 붙들고 밤새며 혼자 싸웠던 기억이 있다."
그의 말대로 시작이 다소 느리지만 그가 걸어온 모든 길들이 연기의 재료가 될 것이라 스스로도 믿고 있었다. 평소엔 극 내향형에 남편, 그리고 두 마리의 고양이와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걸 즐기면서도 언제든 주어지는 기회에 달려나갈 준비가 됐음을 분명히 알렸다.
"가수 활동이 제겐 좋은 경험이자 재료가 되었다. 사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속으로 고충도 많았다. 그래서 가끔 가수 후배들이 조언을 구해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아이돌 가수들의 속은 잠깐만 봐서는 알 수 없거든. 마냥 어려보일 수 있는데 의외로 연기적으로 쓰일 게 많을 수도 있다. 저도 처음엔 여러 선배들께 물어보곤 했는데 선배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더라(웃음).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최근엔 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편집에 재미가 들렸다고 한다. "나의 시간을 기록하고 편집하는 게 재밌어요"라고 답하는 모습에서 차세대 영화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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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아이돌 활동 좋은 경험, 이제야 연기 재미 알아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