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과> 스틸컷
영화 <파과> 스틸컷(주)NEW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정말 다양한 시나리오를 써서 비교하며 고민했었다. 과거 서사를 아예 덜어낸 버전, 조각의 일인칭 시점에서 끌고 가는 버전, 강 선생을 빼고 진행하는 버전 등 여러 개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조각과 투우의 감정이 교차하는 액션 누아르로 돌아오게 됐다."

영화 <파과>는 연출자인 민규동 감독의 말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쓰고 비교한 뒤에야 지금의 형태에 다다르게 됐다는 말에는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아마도 원작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18년 출판된 구병모 작가의 동명 장편 소설이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은 당시 새로운 여성 서사를 탄생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전 세계 13개국에 수출되며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영화적으로도 구미가 당길 만한 소재다. 액션 장르로는 더 그렇다. 여성 서사가 담긴 액션은 종종 있어 왔지만, 60대 여성과 액션이 결합한 작품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일반 액션도 아닌 여성 킬러다. 냉혹하면서도 단호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캐릭터가 필요할 것이며, 이는 격렬한 다툼 속에서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리얼리티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원작은 인물의 내면과 심리 묘사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는 동안 어느덧 생겨나 버린, 지키고 싶은 것들에 대한 감정들이다. 아마도 민규동 감독은 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파과>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조각'(이혜영 분)이라는 인물을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

02.
"늙고 병들었다고 버림받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소설 <파과>가 많은 부분을 할애해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심리적 변화'를 내면 독백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것과 달리, 영화는 이 지점을 초반부에서 훨씬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방역(리스트에 적힌 인물을 요구 조건에 맞춰 암살하는 일) 활동을 하면서도 죽어가는 유기견을 모른 척하지 못하는 모습이나, 실수를 저지른 장비(최무성)를 처리하러 나섰다가 손속을 둬 실패할 뻔한 에피소드, 목격자인 수의사 강 선생(연우진 분)을 규칙대로 처분하지 못하고 살려두게 되는 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각각의 사건은 이후 다른 지점에서 영화의 또 다른 지점과 연결되면서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강 선생과의 조우가 투우(김성철 분)와의 강한 연결고리이자, 조각의 인간적인 면모를 건드리는 트리거로 내내 활용되는 식이다. 미묘한 차이다.

그러나 이 지점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것 중의 하나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정확히는 특정한 행동을 위한 인물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핵심이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따르는 일에 있다면, 영화는 이미 내면이 결정된 인물이 어떤 행동을 보여주게 되는지를 그려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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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조각에게는 과거와 연결된 세 인물이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신성방역'에 새 멤버로 영입된 투우와 수장인 손 실장(김강우 분), 그리고 스승인 류(김무열 분)다. 이 중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대립의 지점에 서 있다. 세 사람은 긴밀하고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자신을 킬러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줬던 스승과 그의 아들이자 현 신성방역의 운영자인 손 실장. 25년 전, 자신의 임무와 얽힌 인물이자 강 선생이라는 목격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투우. 심지어 손 실장과 투우는 조각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을 잡기도 한다.

한편, 스승 류와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곳곳에 분사돼 있다. 영화의 처음에서 손톱이 되기까지의 최소한의 과정을 보여준 것이 시작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회상 장면을 통해 아직 손톱(신시아 분)이었던 인물이 조각이 되기 위해 지나야 했던 과정들이 제시된다. 칼끝에 사정을 두지 말라던 류의 당부와,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28명을 홀로 상대하던 순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이제 조각이 된 인물이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진정한 의미의 '방역'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내고자 하도록 만든다. 영화 <파과>의 최종적인 대결 구도는 이렇게 형성된다.

관계성에만 매몰된 구조적 대립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 선생의 집을 향해 계단을 뛰어오르던 장면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도록 한 연출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다. 이 장면으로 인해 조각이라는 60대 킬러가 의미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돼서다. 그는 '내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킬러이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갇혀 있는 존재'로 이 영화 속에 남는다. 이는 '파과(破果)'라는 타이틀의 이중적 의미 가운데 하나와도 잘 상응한다. 더 이상 생장할 수 없는, 부서진 과실이다.

04.
"이젠 너도나도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진면목은 각각의 인물이 안고 있는 사정과 연결고리가 어느 정도 뚜렷해지는 지점에 다다르고 나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토리 적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꽤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조각이 어떤 내면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는 것과 달리,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서다. 모든 얼개가 드러나고 비로소 격정적인 갈등으로 심화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영화적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다소 흐려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대결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역시 인물의 내면이다. 영화가 바라보고자 하는 핵심은 역시 사정, 손속, 연민과 같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단어와 연결된 '인간성'이다. 사실 원작에서는 이 지점을 '나이가 들면서 자라나 버린 감정' 혹은 '세월의 더께로 인해 무뎌진 냉철함'과 유사한 결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영화도 같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동일할지 몰라도 이를 풀어내는 과정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감독은 처음부터 '킬러'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스승인 류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손톱이 된 인물은 만들어졌다. 인간성을 버리라는, 손속을 두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도 엄격하게 받았다. 그가 가진 킬러로서의 재능인 깔끔하면서도 냉정한 면모가 습득된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억제되었다는 뜻이다. 스승 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은 엄격하고 냉철한 모습이었지만, 그 역시 인간성을 저버린 인물은 아니었다.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물론, 눈길을 헤매다 쓰러진 소녀를 가게로 데려와 묵게 해준 것만 봐도 그렇다.

조각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렇다. 영화에서는 그 처음을 유기견을 집으로 데리고 온 사건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25년 전, 목격자로 남았던 어린 투우(정현준 분)를 매뉴얼대로 처분하지 않고 돌아온 일이 처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 <파과>의 모든 과정은 상실된 인간성을 깨닫는 행위가 아닌,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를 회복하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05.
아이러니하게도 영화화를 위해 몰두했을 작품의 가장 뜨거운 장면, 클라이맥스라고 해도 좋을 조각과 투우의 장면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이끌어왔던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소재와 이야기가 다소 밋밋하고 평범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60대 여성 킬러가 펼치는 하나의 장면으로 영화적 다양성을 확장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적어도 내게는 이야기를 이끌어 오는 동안 복잡하게 얽히던 인물 사이의 사정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한 사람의 내면을 읽어 나가는 일이 조금 더 즐겁게 다가왔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타인은 깊은 인장이 돼 남는다. 무엇이 되고 싶게 하고, 빈자리를 대신 채우게끔 만들고, 무형의 가치를 이어받게 되고자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영화 <파과>를 보는 내내 했던 것 같다. 육신 깊숙한 곳에 새겨진 타인의 인장이 어느 순간 뜨겁게 타오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그 시간과 자리를, 주어진 모든 상실을 의연히 견디고 나아가고자 할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을 의미하는 '파과(破瓜)'가 될 수 있다고 이 영화가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선 조각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며 순수한 의미의 방역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비로소 파과(破果)가 아닌, 파과(破瓜)라는 찬란한 시간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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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과 이혜영 김성철 신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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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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