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과> 스틸컷
(주)NEW
03.
조각에게는 과거와 연결된 세 인물이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신성방역'에 새 멤버로 영입된 투우와 수장인 손 실장(김강우 분), 그리고 스승인 류(김무열 분)다. 이 중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대립의 지점에 서 있다. 세 사람은 긴밀하고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자신을 킬러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줬던 스승과 그의 아들이자 현 신성방역의 운영자인 손 실장. 25년 전, 자신의 임무와 얽힌 인물이자 강 선생이라는 목격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투우. 심지어 손 실장과 투우는 조각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을 잡기도 한다.
한편, 스승 류와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곳곳에 분사돼 있다. 영화의 처음에서 손톱이 되기까지의 최소한의 과정을 보여준 것이 시작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회상 장면을 통해 아직 손톱(신시아 분)이었던 인물이 조각이 되기 위해 지나야 했던 과정들이 제시된다. 칼끝에 사정을 두지 말라던 류의 당부와,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28명을 홀로 상대하던 순간이 이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이제 조각이 된 인물이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진정한 의미의 '방역'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내고자 하도록 만든다. 영화 <파과>의 최종적인 대결 구도는 이렇게 형성된다.
관계성에만 매몰된 구조적 대립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 선생의 집을 향해 계단을 뛰어오르던 장면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도록 한 연출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다. 이 장면으로 인해 조각이라는 60대 킬러가 의미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돼서다. 그는 '내일만을 생각해야 하는 킬러이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갇혀 있는 존재'로 이 영화 속에 남는다. 이는 '파과(破果)'라는 타이틀의 이중적 의미 가운데 하나와도 잘 상응한다. 더 이상 생장할 수 없는, 부서진 과실이다.
04.
"이젠 너도나도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진면목은 각각의 인물이 안고 있는 사정과 연결고리가 어느 정도 뚜렷해지는 지점에 다다르고 나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토리 적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꽤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조각이 어떤 내면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는 것과 달리,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서다. 모든 얼개가 드러나고 비로소 격정적인 갈등으로 심화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영화적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다소 흐려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대결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역시 인물의 내면이다. 영화가 바라보고자 하는 핵심은 역시 사정, 손속, 연민과 같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단어와 연결된 '인간성'이다. 사실 원작에서는 이 지점을 '나이가 들면서 자라나 버린 감정' 혹은 '세월의 더께로 인해 무뎌진 냉철함'과 유사한 결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영화도 같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동일할지 몰라도 이를 풀어내는 과정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감독은 처음부터 '킬러'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스승인 류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손톱이 된 인물은 만들어졌다. 인간성을 버리라는, 손속을 두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도 엄격하게 받았다. 그가 가진 킬러로서의 재능인 깔끔하면서도 냉정한 면모가 습득된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억제되었다는 뜻이다. 스승 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은 엄격하고 냉철한 모습이었지만, 그 역시 인간성을 저버린 인물은 아니었다.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물론, 눈길을 헤매다 쓰러진 소녀를 가게로 데려와 묵게 해준 것만 봐도 그렇다.
조각이 되고 난 이후에도 그렇다. 영화에서는 그 처음을 유기견을 집으로 데리고 온 사건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25년 전, 목격자로 남았던 어린 투우(정현준 분)를 매뉴얼대로 처분하지 않고 돌아온 일이 처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 <파과>의 모든 과정은 상실된 인간성을 깨닫는 행위가 아닌,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를 회복하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05.
아이러니하게도 영화화를 위해 몰두했을 작품의 가장 뜨거운 장면, 클라이맥스라고 해도 좋을 조각과 투우의 장면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이끌어왔던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소재와 이야기가 다소 밋밋하고 평범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60대 여성 킬러가 펼치는 하나의 장면으로 영화적 다양성을 확장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적어도 내게는 이야기를 이끌어 오는 동안 복잡하게 얽히던 인물 사이의 사정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한 사람의 내면을 읽어 나가는 일이 조금 더 즐겁게 다가왔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타인은 깊은 인장이 돼 남는다. 무엇이 되고 싶게 하고, 빈자리를 대신 채우게끔 만들고, 무형의 가치를 이어받게 되고자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영화 <파과>를 보는 내내 했던 것 같다. 육신 깊숙한 곳에 새겨진 타인의 인장이 어느 순간 뜨겁게 타오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그 시간과 자리를, 주어진 모든 상실을 의연히 견디고 나아가고자 할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을 의미하는 '파과(破瓜)'가 될 수 있다고 이 영화가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선 조각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며 순수한 의미의 방역을 처리해 나갈 것이다. 비로소 파과(破果)가 아닌, 파과(破瓜)라는 찬란한 시간에 이르러.
▲영화 <파과> 스틸컷(주)NEW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