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있다. 말 그대로 동작을 멈춰 만드는 애니 영화다. 통상 애니를 만화와 동의어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지만, 실은 만화는 애니를 만드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애니란 정적인 것을 이어 붙여 역동성을 부여하는 영화의 한 분과로, 만화와 그림, 인형 등이 모두 수단이 된다. 만화를 연결한 애니가 가장 일반적일 테지만, 때로는 회화나 조각, 인형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애니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화 외의 수단으로 제작한 애니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게 스톱모션 애니다. 대표적으로 아드만 스튜디오의 역작 <월레스와 그로밋>, 헨리 셀릭과 팀 버튼의 명작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유령신부> 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아! 저 유명한 드림웍스의 <치킨 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스톱모션 애니는 다시 재료에 따라 점토로 빚는 클레이와 석유에서 추출한 젤인 플라스티신 등으로 나뉘지만, 어디까지나 재료일 뿐 큰 의미는 없다. 스톱모션 애니인데 재료를 강조하고플 때 클레이 애니라고 칭하는 정도이지 학술적 명칭은 아니다.
초속 생성 시대, 손으로 빚어 만든 애니
▲달팽이의 회고록스틸컷
해피송
스톱모션 애니는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직접 제작해 만든다. 주인공 등 인물은 물론이고, 사소한 배경까지도 직접 제작해 빚어야 한다. 인형 하나하나를 공들여 만들고 조금씩 바꾸어서 수많은 쇼트를 찍은 뒤 이어 붙이는 작업인데 필요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표정이며 몸짓까지 반영해야 한다.
초마다 24프레임으로 구성되던 전통적인 필름영화에서 각 프레임을 모두 개별적으로 사진촬영한 뒤 이를 이어 붙인다는 게 스톱모션 애니의 기본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이 빚어야 한다는 말인가. 스톱모션 애니가 노력집약적 작품이라 불리는 이유다.
이를테면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 중 2005년 나온 <월레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는 250여 명의 제작진이 5년을 들여 만들었다. <치킨 런>은 300명 넘는 인력이 투입돼 4년을 꼬박 제작했다. 인형을 직접 빚고 사소한 소품이며 배경까지 챙겨 한 땀 한 땀 나아가다 보니 수고가 한없이 든다. 이럴 거면 톱배우를 캐스팅해 실사영화 한 편을 찍는 게 낫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스톱모션 애니는 AI가 단 몇 초면 요청받은 이미지를 뚝딱 생성하는 오늘의 세태에 역행하는 장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온종일 그렸을 그림들을 단 몇 초면 별 차이 없이 생성하는 이 시대에 딱 1초 쓸 프레임에 들어간 것들을 하나하나 반죽하고 빚어내니 그 과정이 여간 비효율적이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비효율이 스톱모션 애니만의 멋이 되었으니 놀랍지 아니한가.
한 장면 한 장면이 미술
▲달팽이의 회고록감독 애덤 엘리어드
해피송
<달팽이의 회고록>은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대상격인 크리스탈 작품상을 받은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다. 호주 출신 작가 애덤 엘리어트의 신작으로, 한국에서도 개봉한 바 있는 <메리와 맥스>에 이어 두 번째 장편 작업이다. <플로우>에 밀려 오스카 수상에는 미끄러졌으나 애니 업계 최고라 불리는 안시의 주인공이 된 건 스톱모션 애니가 갖는 특별함, 즉 어마어마한 노력의 장인정신에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스톱모션은 축음기로 음악 듣고 전보로 통신하는 이들이나 할 법한 도전 아닌가.
한 장면 한 장면이 미술작품을 보는 듯한 <달팽이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저 감각적 미학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예술의 또 다른 근간인 서사에도 충실히 임한다는 뜻이다. 기실 애덤 엘리어트는 많은 스톱모션 애니 작가들이 그러하듯 아이가 아닌 어른들을 위한 영화를 제작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보지 못할 만한 이야기인 것은 아니지만, 불운과 좌절, 고통스런 기억과 그에 대한 극복까지가 망라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아동친화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영화 가운데 변태성욕이라 부를 법한 특징을 가진 인물까지 등장하지 않던가. 소위 올바르지 못한 것들로부터 아이를 격리하는 것이 훌륭한 교육법이라 믿는 한국에선 애들에게 적합한 영화는 아니다. 클레이 애니임에도 15세 관람가 딱지가 붙은 건 이 때문이라 보아야 할 테다.
애니는 달팽이 모양을 좋아해서 관련된 물건은 죄다 수집하는 여자 그레이스의 이야기다. 그레이스는 함께 살던 괴짜 할머니 핑키가 죽고 난 뒤 키우던 애완 달팽이 실비아에게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그로부터 그레이스의 지난 시간들,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대체 그녀는 왜 집 전체에 가득 찰 만큼 달팽이 관련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텃밭에 앉아 키우는 달팽이에게 신세 한탄을 하나.
죽음, 상실, 우울을 딛고 일어나는
▲달팽이의 회고록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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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는 무겁고 우중충하다. 그레이스는 쌍둥이 오빠 길버트와 함께 홀아버지 아래 자랐다. 아버지는 거리에서 공연하는 행위 예술가였는데, 어느 날 차에 치여 장애인이 되고 만다. 한순간에 꿈이 꺾여버린 아버지는 술이 늘고 건강까지 좋지 않아 아이들을 충실히 돌보지 못하였다.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난 그레이스는 수술을 했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아이들에게 놀림까지 받는다.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그레이스를 길버트가 곁에서 지킨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다 몸이 좋지 않고 술을 자주 마시는 홀아버지, 학교에선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까지 하는 그레이스다. 어느 모로 보나 영 좋지 못하다고 판단하기 십상인 그레이스의 삶은 그러나 보기보단 괜찮았다. 무엇보다 함께가 아닌가.
그레이스의 평안은 단박에 깨어진다. 아버지가 어느 날 숨을 거두고, 남매는 돌볼 이 없이 남겨진다. 고아가 된 남매는 아동보호기관을 통해 각기 입양간다. 다행히 그레이스는 그리 나쁘다곤 할 수 없는 부모를 만났지만, 길버트의 사정은 영 좋지 못했다. 호주 서부 주도인 퍼스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 농장, 어디 사이비 소굴 같은 가족교회를 운영하는 일가족이 길버트를 입양했다. 말이 입양이지 공짜 일꾼이며 말단 신도와 같은 신세를 길버트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그토록 가까웠던 길버트를 만나지 못하고 홀로 살아간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제법 많은 미덕을 가졌는데, 그중 하나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겉보기로만 보자면 본래 그레이스의 삶은 가난하고 돌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레이스는 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또 저와 오빠가 서로를 돕듯이 그들이 제 아버지를, 또 아버지가 그들을 돕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뭉쳐 세상의 어려움에 맞섰고, 집 안에서 고요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있었던 터였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달팽이의 회고록포스터해피송
마찬가지로 그레이스가 입양된 가정은 대충 보면 적당한 재산에 나쁘지 않은 성품을 가진 부부이지만, 그레이스에겐 영 걸맞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자기계발서를 맹신하는 얄팍한 이들이기도 하다. 아버지, 또 오빠와 함께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예술에 소양을 쌓았던 그레이스로선 감정적 교감은 물론, 이성적 교류조차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저 호주 반대편 오빠에게 달려갈 수도 없어서 그레이스는 마음 둘 곳 하나 갖지 못한 외로운 아이로 자라난다.
애니는 그런 그레이스에게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 핑키 할머니와의 세대를 뛰어넘는 관계를, 또 요상한 애인과의 만남으로부터 겪은 일련의 이야기를, 무엇보다 오빠 길버트의 사건까지를 하나하나 공들여 풀어나간다. 작은 소품까지 세심히 빚어낸 스톱모션 애니의 매력 가운데, 삶을 살아내게 하는 동력을 진지하게 관찰해 표현하는 작가주의적 시선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엘리엇이 그 전작보다도 한층 성숙한 시선으로 삶과 사람, 관계를 바라보게 되었단 걸 깨닫게 한다.
엘리엇은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두고 '보편적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어쩌면 그 말이 적절한 답일 수도 있겠다. 그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달한다. 가족과 관계를 바탕으로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건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그레이스가 겪어낸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건들로 빚어질 때 관객은 비로소 제가 지나온 고통과 극복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로부터 저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가. 영화 속 그레이스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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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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