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피엔드(Happy End)'. 직역하면 행복한 끝. 끝이 행복하다는 게 무슨 말일까. 저기 가정법원을 나오며 이제야 내 삶 좀 제대로 살 수가 있겠다고 해방감에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일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클리셰적 동화의 결말 같은 무엇일까. 그도 아니면 '좋은 죽음'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euthanasia', 곧 안락사 같은 것일까.

영화 <해피엔드>를 보고 나면 이 중 세 번째 것, 안락사가 떠오른다. 죽어가는 생명을 마주하여 그래도 존엄하게, 아니 존엄까진 아니라도, 적어도 행복이나 안락함 정도는 보장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영화 내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망해가는 일본, 지역이 소멸하고 인간은 늙어가며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 고립된 섬나라의 자조가 이 영화 <해피엔드>를 지배한다.

그저 이 영화 한 편만은 아니다. 올해 한국 극장가에 걸렸거나 앞으로 걸릴 영화 가운데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야마나카 요코의 나미비아의 사막> 같은 작품에서 죄다 이와 같은 정서를 마주할 수 있다. 어느 것엔 '저출산'이며 '지방소멸' 같은 이슈가 직접적으로 논해지고, 또 어느 것에선 극소수의 번듯한 청춘과 전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낭비되는 젊음이 대비되기도 한다. 도전은 쉬이 좌절되며 활력은 끝내 무기력에 도달하고 어쩌다 이뤄지는 승리조차 더 큰 시야에선 명확한 패배로 귀결되는 이야기, 요 근래 일본영화에서 거듭 발견되는 소재 아니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 근미래 다섯 친구 이야기

해피엔드 스틸컷
해피엔드스틸컷영화사 진진

<해피엔드>는 소라 네오의 극영화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한국에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됐고, 반년 만에 정식 수입돼 개봉에 이르렀다. 소라 네오는 2023년 세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이름을 알린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다. <해피엔드>는 그의 첫 장편 극영화로, 자신의 재주가 다큐만이 아님을 알리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중심엔 모두 다섯 명의 친구가 있다. 언제나 그러하듯 관계며 이야기에도 중심은 있는 것인데, 여기선 유타(쿠리하라 하야토 분)와 코우(히다카 유키토 분)가 되겠다. 유타는 EDM(Electronic Dance Music·전자댄스음악), 특히 디제잉에 매료된 학생이다. 학업이며 다른 데는 영 관심이 없지만 커다란 소리가 가죽을 직격하는 음악에만큼은 진심이다. 박동하는 음향이 심장소리와 닿아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서일까. 음악이 그치면 영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동태눈깔이 음악이 울릴 때만큼은 초롱초롱하기 그지없다.

말 그대로 죽마고우, 코흘리개시절부터 유타와 함께 커온 코우다. 재일동포 4세인 코우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나 귀화하지 못했다. 부모는 어떻게든 그가 성인이 되어 귀화시험을 통과하길 바라지만, 그 요건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 여기에 흑인인 톰(아라지 분)과 대만 혼혈 밍(시나 펭 분)까지 부모가 순수 일본계가 아닌 이들이 과반이 된다. 특별히 나서지 않는 성격이지만 패션에 관심 많은 아타(하야시 유타 분)까지 더해져서 이들은 다섯 명의 단짝친구 그룹이다.

학생 감시하는 학교, 학생들의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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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배경으로 꾸려진다. 배경이 되는 시점은 가까운 미래인 듯, 학교엔 요즈음 기술로는 쉽지 않은 CCTV 감시를 통한 별점부과 제도가 전격 도입돼 운영되는 중이다. 제레미 벤담이 창안하고 미셸 푸코가 확장한 판옵티콘의 감시체계를 연상케 하는 이 시스템은 그 이름부터가 파놉니(Panoptny), 다분히 풍자적이다. 고성능 카메라로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 상황에서 학칙을 어긴 학생들의 행동이 일일이 지적돼 벌점이 부과된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친구와 다투고, 이성과 애정행각을 하는 등이 모두 제지사항이다. 벌점이 쌓이면 작게는 청소부터 크게는 정학이나 퇴학까지도 당할 수 있다. 학교가 순식간에 감시의 공간으로 전락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다섯 친구, 특히 유타는 EDM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찾은 클럽에서 미성년자란 이유로 입장하지 못한 그가 기지를 발휘해 직원통로로 몰래 숨어들었다가 끝내주는 음악과 마주한 것이다. 때마침 경찰이 출동해 클럽 안이 소란에 휩싸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DJ 앞에서 비트에 몸을 맞긴 건 유타, 그리고 그 절친인 코우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DJ에게 그 역작이 담긴 USB를 받고 교내 음악동아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온갖 음향장비를 구해 학교 빈 교실에 모아두고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구현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황금기는 금세 끝나버리니, 학교가 이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동아리방을 폐쇄한 것이다. 시끄러운 EDM은 가뜩이나 엄격한 학교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으니 예고된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은 질풍노도의 10대 소년들이 아닌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모든 장비를 빼돌려 인근 공사장에 가져다 놓는 데 성공한다. 동아리방을 학교 바깥으로 옮겨 저들의 활동을 이어가겠단 것이다.

<해피엔드>는 고등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둔 다섯 친구의 한 계절을 다룬다. 다분히 청춘영화스러운 설정 가운데 학교에 맞서 저들의 취향을 지켜내고, 부당한 압력에 저항해 투쟁하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청춘답게 우정과 사랑의 피고짐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마음이 그러하듯, 관계 또한 변화한다. 피고 자라고 물들어 떨어지는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삶과 같이 다채롭다.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 않지만 돌아서 바라보면 그 모두가 인생이다.

일본은 끝났다는 절규... 정말 그러한가

해피엔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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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색깔이 모였다고 아름다운 그림이 되지 않듯, 그 반대 또한 그러하듯, <해피엔드>가 그리는 크고 작은 사건과 그것들이 모여 빚어낸 주된 메시지며 결말이 남다르다. 작은 승리와 작은 실망, 작은 마음의 피어남과 성취와 발전과 단절들이 그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영화의 끝은 우정의 확인이며 찬란한 청춘의 단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 보면 그 결말은 어딘지 불안하고 음울한 이야기의 시작점이 될 것만 같고, 이제부터야 말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내용이 펼쳐질 것도 같다.

영화 속 불안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세상은 끝났다'고 '권력자에게 호소해야만 무엇을 바꿀 수가 있다는 무력감' 따위의 이야기가 절규처럼 들려온다. '요즘 음악은 듣지 않는다'며 '지나간 음악을 뒤져서 좋은 걸 발굴할 뿐'이라는 우울한 소리가 뱉어지고, 그를 반박하는 희망적인 성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생김부터가 혼혈이며 이민자의 자식들처럼 보이는 학생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처럼 일본 국적조차 취득하지 못하고 이등시민처럼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교실의 절반을 넘어선다. 화합이며 포용의 기색은 전무하며, 받아들일 밖에 없어서 그저 함께 존재할 뿐인 다름이 잡초가 곡식보다 많은 논밭처럼 엉망진창 펼쳐져 있다. 통제가 교육의 자리를 대신한 학교에선 교장과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한다. 온통 절망과 쇠락, 암울한 미래뿐인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일본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것도 아주 근미래를 배경으로.

이 글 첫 문단에서 적었듯 <해피엔드>가 세 번째 해석, 곧 안락사에 가깝게 읽힌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어차피 끝났다며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듣겠다는 유타와 어렵지만 일어서 현실적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친구들을 대비하는 모습이 영화 가운데 커다란 줄기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후자의 성취를 감동적으로 연출하는 클리셰적 자세를 거부한다. 파놉니의 폐지란 도전은 학생들의 쟁취라기보단 교장의 시혜적 조치를 통한 변화에 가깝다. 그마저도 교장의 변심으로 조건부로 이어진다. 그 변심은 한 학생의 퇴학,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통해서다.

'End' 아닌 'And'를 위하여

해피엔드 포스터
해피엔드포스터영화사 진진

<해피엔드>가 비극적으로 읽히는 건 청춘영화적 분위기가 아이리스로 가둬지는 마지막 쇼트를 통해서다. 액자처럼 안전하게 보관되는 이 따스한 장면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두 인물이 걸어갈 삶이 더는 안온하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일본은 독재를 향해 나아가고, 저항은 별 어려움 없이 해소된다. 학교엔 언제고 다시 파놉니가 운영될 수 있으며, 새로 들어온 학생들은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다. 소멸, 쇠락, 고립, 단절, 우울, 무기력 따위가 교차하는 이 영화가 그나마 이 세계의 가장 밝고 희망찬 순간일 수 있다는 건 그대로 절망이다. 그렇다면 안락사, 그나마의 행복한 끝을 바라는 게 현명한 길일까.

한국이 일본을 10년의 시차를 두고 따른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들었다. 그 시간차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해피엔드>를 위시한 일본 최근 영화들의 경향성은 일본 사회가 처한 위기를 말한다. 그것이 한국의 미래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명백해 보인다. 일본의 지방소멸과 인구절벽을 한국은 더 강하게 맞이할 테다. 결혼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으며 취업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한국 또한 따르고 있다. 미래에 대한 대비 없이 오늘에 안주하는 영화 속 일본의 풍경이 우리의 운명과 다르다고 양식 있는 이라면 차마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해피엔드'는 어찌됐든 엔드다. 끝을 원치 않는 이에게는 앞의 해피조차 허락되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소라 네오가 이 이야기로 장편영화를 만든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관계 가운데 미묘한 균열과 단절을 그려낸 소라 네오의 관심, 그건 바로 연결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주 닿음, 그로부터 일으킬 수 있는 분명한 변화 말이다.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해피엔드 Happy End'는 '해피앤드가 Happy, And'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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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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