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곤 감독이 숨졌다. 향년 56세의 이른 나이, 그를 아는 이들이 슬픔에 젖었다.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거쳐 영화에 입문해 비주얼리스트로 기대됐으나, 그저 영상이 아닌 이야기에도 상당한 재주를 보였던 아까운 재능이었다.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인사동 스캔들> <퍼펙트 게임>은 비교적 흔한 장르 가운데서도 저만의 스타일을 선명히 확립한 인상적 작품이었다. 십수년이 지나서까지 OTT에서 꾸준히 돌려보는 팬들이 있을 만큼. 다만 기대를 모은 <명당>의 실망스런 완성도, 근작인 <타겟>까지 아쉬운 성적을 거두며 주춤했던 터였다. 그 재능을 믿고 반드시 재기하리라 기대해온 팬 입장에선 타계 소식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다가온다.
<인사동 스캔들>과 <퍼펙트 게임>, 두 작품은 박희곤 영화인생의 두 기둥이다. 두 작품은 명백히 공통점을 가졌다. 우선 확고한 장르가 구축된 상태에서 각본과 연출에 돌입해야 했다는 점이 그렇다. <인사동 스캔들>은 <범죄의 재구성> 이후 끊이지 않고 제작되던 범죄영화, 케이퍼물이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만큼 그 반대급부로써 한국인이 유달리 범죄영화를 즐기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이 시절 범죄영화의 흐름이 거셌다. 처음엔 조폭영화가 범죄의 주류를 이뤘으나, 2004년 <범죄의 재구성> 이후로는 판을 잘 짜서 무엇을 훔치거나 한탕 사기를 치는 작품이 대세가 됐다.
▲퍼펙트 게임박희곤 감독(오른쪽)
롯데엔터테인먼트
감독 박희곤의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
문제는 함량미달의 졸작이 너무나 많았던 점이다. 장르물, 특히 유행의 정점에 있는 장르영화란 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정형화해 소위 클리셰로 답습하게 마련인데, 대다수 작품이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주인공인 범죄집단이 꾸려지는 과정에서 주동자가 각자 전문분야를 가진 이들을 섭외하는 대목부터, 상대하기 어려운 은행이나 미술관, 부잣집 등을 털기로 모의하는 설정, 배신과 반전이 잇따르며 관객의 허를 찌르는 장치까지가 하나하나 그렇다. 심지어는 캐릭터들마저 약간 모자란 녀석과 괴짜, 예쁜 여성과 천재적인 계략가에 이르기까지 정형화되며 관객들이 장르에 기대하는 바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작품은 시간의 냉혹한 평가 아래 사라지고, 소환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인사동 스캔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2009년 작인 영화는 박희곤의 장편 데뷔작이다. 직접 각본까지 맡아 준비했는데, 범죄영화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결코 과한 시도를 하지 않는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다. 주연인 김래원과 엄정화, 임하룡 등이 당대 톱배우라 부르기엔 조금씩 아쉬운 평가가 따랐음에도 여기선 제게 꼭 맞은 옷을 입은 듯 훌륭한 연기를 펼쳤단 점도 인상적이다.
<퍼펙트 게임>은 어떠한가. 스포츠 영화란 크게 두 가지 구성으로 펼쳐지게 마련이다. 선수가 성장해 목표를 달성하거나, 온 힘을 다해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강적과 맞서는 이야기다. 물론 영화란 것이 무 자르듯 이쪽 아니면 저쪽이 될 리는 없는 일이고, <퍼펙트 게임> 또한 두 구성 사이를 오가며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어찌되었든 중점이 되는 것은 두 선수의 정점에서의 맞대결이고, 그 안에 성장과 극복, 경쟁을 담아낸다.
▲퍼펙트 게임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캐릭터에 집중하고 캐릭터를 살려낸다
두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한다면 캐릭터에 집중한다는 점일 테다. 이는 박희곤 감독의 주요한 장기 중 하나인데, 그가 맞는 캐릭터는 다분히 전형적일지라도 관객을 끌어들이는 진정성이 있다는 점일 테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물들인데, 그 친숙함만을 취하고 빤하다는 인상은 거두는 적절한 배합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퍼펙트 게임>의 두 주인공 선동열(양동근 분)과 최동원(조승우 분)은 한 쪽은 있는 그대로 최동훈을 보는 듯 구현한 반면, 다른 한 쪽은 자유분방하지만 설득력 있는 재해석이 들어가 미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극중 최동원은 자기관리의 화신이다. 특출난 재능이야 물론이었겠지만, 제구력처럼 칼같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그로부터 일어나는 카리스마를 은근히 발하는 모습이 실제 최동원을 보는 듯하다. 최동원을 기억하는 팬들까지 감탄할 만큼의 싱크로율이 얼마 닮지 않은 용모에도 불구하고 구현돼 놀랍다. 무엇보다 조승우는 극 중후반부터 눈빛과 표정 등 간단한 연기만으로도 감정과 상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안정된 연기를 선보인다. 점차 비중이 최동원에서 선동열로 옮겨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존재감의 비중만큼은 밀리지 않고 꼭 중앙을 맞추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넉살 좋던 선동열이 성장을 거듭해 도리어 당대 최고이던 최동원을 추월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극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니만큼 분명한 감동 또한 있는데, 영화는 그저 실화를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야구 사상 가장 극적인 경기로 모두가 동의하는 1987년 5월 16일의 대전, 4시간56분, 연장 15회까지 양쪽 선발이 완투를 가져간 끝에 2대2의 무승부로 마쳐진 대접전이 아니었던가. 이날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뿌리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선수는 물론, 양 팀, 나아가 팬들까지가 전력을 다했다. 역사가 쓰이고 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았다.
박희곤 감독은 사실을 재현하는 대신 초월하기를 선택했다. 재현만으로는 사실이 주는 진짜의 감동을 이겨낼 수 없으리란 판단 때문이었을 테다. 그리하여 그는 두 배우 외에도 만년 2군이던 해태 포수 박만수(마동석 분)의 극적순간을, 또 변화하는 동료 김용철(조진웅 분)에게 확고한 존재감을 허한다. 주연에겐 상당부분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극적 장치가 되는 조연 캐릭터들에겐 의도적으로 조정된 역할을 맡겨 이야기가 보다 맛깔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예비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인사동 스캔들박희곤 감독(왼쪽)과 엄정화 배우SK텔레콤㈜
인물을 그릴 줄 아는 감독
<인사동 스캔들>에서도 주조연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정해 서로의 역할과 균형을 극대화시키는 솜씨가 상당하다. 이야기는 가상의 조선시대 명화 '벽안도'를 둘러싸고 펼쳐진다.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던 이 그림을 찾아내 한국에 가져온 비문갤러리 회장 배태진(엄정화 분)과 그녀가 고용한 독보적 실력의 복원사 이강준(김래원 분)을 중심으로, 인사동 살아있는 족보 권 마담(임하룡 분), 위작공장을 운영하는 호진사 사장(고창석 분), 모작에 대단한 솜씨를 가진 박가(손병호 분), 심지어는 경찰(홍수현 분)까지 얽혀들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을 빚어낸다.
박희곤 감독은 여기서도 주역과 조역 사이에 적절한 관계성과 긴장감을, 또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하는 캐릭터와 그 이유까지를 설득력 있게 마련해둔다. 이로써 극 자체는 흔한 인상이 없지 않는 장르물임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매력적이라 느낄 수 있도록 거듭 빚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물을 다룰 줄 안다. 특히 다수 인물이 번갈아 등장하는 극적 장르물에서 말이다.
물론 박희곤 감독을 한국영화에 손꼽을 만한 거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다. 그의 작품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스타일이 식상하고 서사가 부진하다는 등의 평을 내놓은 데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캐릭터는 언제나 선명했고 다양한 인물들 간의 균형 또한 적절했다고, 그와 같이 해낼 수 있는 감독이 세상에 그리 흔한 건 아니라고, 나는 반드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할 날이 따로 없는 때문이다. 그는 인물을 다룰 줄 아는 감독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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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캐릭터에 진심이었던 박희곤 감독 타계,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