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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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규동 감독의 작업 현장을 경험해 보니 어땠나.
"매일 일지를 쓰는데 다시 읽어보면 불만투성이다. 감독님은 저를 꽁꽁 묶어두었다. '너무 귀엽다', '너무 걸어갔다', '너무 친절하다', '감정을 빼고 더 쿨해야 한다'고 지적 사항만 늘어났다. 시나리오 수정도 잦았다. 30분마다 수정본을 보냈고 심지어 잘 때도 보내는데, 이걸 보려면 돋보기도 써야 하고 피곤하다 보니 안 보게 된다. 다음 날 다들 새 수정본으로 합을 짜서 왔는데 저만 다른 버전 시나리오가 입력된 상태로 그냥 가게 되는 거다. 대역 배우까지 다 세팅돼 있는 상황인데, 혼자만 못한다고 하면 어떡하냐며 감독님께 한 소리 들었다.
그때 서로 이해하게 됐다. 감독님은 제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파악했다. 고통을 체험해야 연기가 나오는 편이다. 정해진 프레임 안에 갑자기 바뀐 시나리오라면 실력도 발휘되지 않고 인형처럼 굴게 된다. 그런 걸 서로 원하지 않으니까 감독님도 그 안에서 찾아가고 저도 맞춰 나가겠다고 합의를 봤다.
엄살과 불신이 깊어졌지만 속으로는 그 반대를 기대하는 양가적 감정까지 들었다. 절제하라고만 디렉팅 주는데 어느 배우가 살아남을까 싶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를 가두는 제약 속에서 창의성이 필요했다. 감독님의 머릿속에서 이미 놔주고 당겨야 할 때를 그려내고 있었고, 결국 배우 조련을 잘 한 거다(웃음). 함몰당하는 배우가 아닌 싸우겠다는 투지력이 생겨났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베를린에서 완성본을 보자 미안했다.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제 스타일대로만 하고 통제가 안 되면 젊은 감독 누가 돼도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여러 가지로 제가 한 수 배웠다."
- 오랫동안 웬만한 영화와 드라마 현장을 다녔다. 지금까지 디렉팅을 지시했던 감독이 없었던 건가.
"임권택 감독님도 저한테 안 그러셨다(웃음). 제 연기는 대충 하는 무지에서 나온다. 본능에 따르는 거다. 지금까지는 상상도 안 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하는 게 통했다. 그때 만들어진 희열을 즐겼다. 제 의견을 다들 존중해 줘서 잘 몰랐다. 지금 영화 현장과는 너무 다르지만 그때는 넉넉하고 여유로웠던 시절이지 않나. 상상해서 준비해 가도 막상 그것대로 안 되는 게 현장이었다. 제가 이쪽을 봐야 하는데 저쪽을 보겠다고 했기 때문에 카메라 워킹이 힘들어 벽을 뜯은 경우도 있었는 데 뭘...(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피곤했던 거였다. 남 신경 안 쓰고 지낸 사실을 이제야 느겼다. '상대 배우, 감독, 스태프 모두가 힘들었겠다' 하고 깨달았다."
- 내내 고생하면서 촬영한 게 느껴진다. 특별히 애착 가는 장면이 있나.
"조각의 외로움, 고독, 흔들림 같은 감정이 편집 때 다 사라졌다. 편집된 부분을 다 넣어서 3시간짜리 감독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쉬움이 크지, 제가 멋있게 나왔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항상 부족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긍정적 반응이나 노년이 무언가를 보여줬다는 말에 위로받게 되더라."
- 투우와 폐건물에서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 촬영 후 털썩 주저앉았다고 했다. 처절함과 애잔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어 인상적이었다.
"<파과>를 관통하는 단어는 '쓸모'다. 쓸모라는 단어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건 '쓸모가 없다'였다. <파과>를 해냈다는 게 배우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 같았다. 쓸모없는 인간이 쓰임새를 얻어 다시 살아간다. 조각은 류로 인해 쓰임새를 얻어 살아갈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무사히 끝내야 한다며 달려온 거다. 막상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치니, 어디로 가야 하지 싶을 정도로 앞이 깜깜했다. 왜 끝나야 하는 건지, 보상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매달리는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 조각과 투우는 애증을 넘어선 성적 긴장감마저 든다. 유사 모자 관계, 존경과 질투의 대상, 에로틱한 분위기로 비칠 정도다.
"상대 역 때문에 제가 '섹스어필'이란 말까지 듣게 된 건 순전히 김성철 배우의 매력이다. 어린 상대가 훅 들어오는데 압도당하면서도, 때릴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저돌적이면서도 청순한 에너지가 조각과 투우의 관계를 만들었다. 감독님은 다 계산돼 있었겠지만 투우만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 본인이고 조각과의 관계도 김성철이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투우는 조각에게 과거의 실수이자 처리하지 못한 오점이다. 조각은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지만 투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감정을 유지해야 해서 힘들었을 거다."
- 류(김무열)의 죽음 이후 곁을 내어 주고 지켜야 할 생명체를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강 선생(연우진)과 무용(강아지)으로 변화된 감정이 커진다.
"조각은 강 선생이 류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 류에 대한 감정은 남자, 스승, 아버지, 보호자 등 손톱의 겉싸개 같은 존재다. 과거 손톱(신시아)이던 시절, 쓸모를 류로부터 배웠던 거다. 류가 죽자 따라 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다가 최근 강 선생이 류를 연상케 했다. 강 선생과 그의 딸(해니)을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게 된다. 그 마음을 담아 마지막에 절 같은 90도 인사를 하면서 충분히 전달하는 거다. 무용을 연기한 강아지는 영특했는데 알다시피 동물과 촬영이 어려워 오래는 못 했다. 무용은 조각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도구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나이에 한 수 배우며 성장했다"
▲영화 <파과> 스틸컷(주)NEW
- 곧 연극 <헤다 가블러>도 공연한다. 초연 참여 후 1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선 소감은 어떤가?
"한창 연습 중이다. 초연 때와 같은 연출 감독과 재회했고 국립극단의 다시 보고 싶은 연극 순위에 들어 기쁘다. 예전에 원로 배우 김의경 선생의 칭찬에 고무돼 환상에 빠졌었다. 그해 상도 2개나 받았는데 사실 회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헤다'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캐릭터라 착각했던 거다. 지금은 그때의 유니크함이 사라져서 못한다고 거절했더니 '자신 없냐'는 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도전 의식이 생겨 수락하게 됐다. 지금에서야 그 깊이감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이영애씨 버전도 궁금하고 기대 중이다."
- 연기의 원동력,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그리고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게 뭔지 궁금하다.
"무지함?(웃음) 알기도 귀찮고 아는 것도 없다. 저의 세계에만 갇혀 있다. 남들 다 아는데 나만 몰라서 상상하고 기대하다 나중에 실망하고 혼자 욕한다(웃음). 연기 교육을 정식으로 받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통제당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에다가 배우가 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던 사람이다. 해보고 싶은 역할보다는 <파과> 같은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천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롭게 만나는 감독의 그릇에 따라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 세월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배우다.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매력이 무엇이라고 보나.
"한 행사에서 보톡스를 안 맞아서 민 감독님이 절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아직 답을 안 줘서 그건 모르겠다. 다만 늙으면 보톡스를 맞든 안 맞는 흉한 건 사실이다(웃음). 아무튼 저만의 매력이라면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아닐까. <피도 눈물도 없이> 때 택시 운전사 역할을 맡았는데 누가 사모님 목소리라며 지적했었다. 조각 목소리도 사모님 분위기가 나오면 안 되나 걱정해서 다양한 목소리를 흉내 내봤는데 그게 연기하면 더 웃길 것 같아 관뒀다.
감독님도 배우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던 거 같다. 오히려 선입견을 품을 만한 나이 든 여성 킬러 레퍼런스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민규동 감독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를 좋아하는데 필모그래피 중 의외라 놀랐다. 댄스 실력도 있고 리듬감도 좋더라. 저도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뮤지컬 영화로 또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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