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의 사막>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카나는 요즘 유행하는 MBTI(성격 유형 검사) 따위로는 도저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노는 걸 좋아하지만 딱히 사치를 부리거나 외모를 무기로 삼지 않는다. 독특한 행동을 종종 보이긴 해도 직장은 그만두지 않는다. 모두가 칭찬하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쉽게 돈을 벌거나 무기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필요하면 충분히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싹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녀는 자주 어딘가를 공허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응시하고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곤 한다. 카나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을 애타게 갈망하지만, 정작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이상적인 동거 상대로 보였던 하야시와도 이내 다툼이 일어난다. 아니, 갈등 정도가 아니다. 청춘 남녀의 애정 싸움과 차원이 다른 육박전을 불사하는 수준이다. 처음엔 그저 블랙코미디처럼 보이지만, 그 강도가 점점 거세진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카나와 하야시는 서로에게 질리고 역정을 내다가도 곧 화해하고 자주 냉전 상태를 유지한다. 소강상태가 계속되면 다시 뜨겁게 타오르며 시간을 보낸다. 끝없이 그렇게 반복될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카나의 불안은 점점 심해진다. 그냥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녀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자 애타게 노력한다.
하지만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무한정 확산하는 강박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카나의 기행은 날로 심해지고, 뇌내망상과 현실의 경계는 점점 흐려진다. 신비로운 이웃집 여성의 등장은 과연 그가 실존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어떤 초월적 계시인지도 모호한 지경이다. 현실의 도쿄를 배경으로 삼던 화면은 어느새 지금 펼쳐지는 풍경이 실제인지 공상인지, 여태껏 봐왔던 내용이 어쩌면 '극 중 극'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이른다.
그럼에도 카나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길을 헤매는 데 여념이 없다. 과연 그녀가 품은 문제는 무엇일까? 본인조차 자신에 대해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수많은 질문을 하나씩 꼼꼼히 분석하기엔 상영시간 내내 화면을 종횡무진 독점하는 카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무엇 하나 불투명한 가운데에도 그녀는 마치 눈부신 환상처럼 이리 펄쩍 저리 번쩍하며 한순간도 정중앙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은 이 기이한 주인공에 마치 홀리듯 빨려들어 137분의 여정에 합류한다.
순수해서 괴로운 존재 앞에 펼쳐진 이상한 세상
영화의 뜬금없는 제목은 주인공이 멍하니 시간을 죽일 때 즐겨보던 동영상 속 남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사막 풍경에서 따온 듯하다. 하지만 작품 내용은 자연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하기야 역설적으로 따진다면, 겉과 속이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시선에 도무지 이해 불가인 도쿄의 풍경은 불모의 사막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마치 부조리극 등장인물 같은 군상들로 채워진 '인간 동물원'과 다를 것도 없다. 그런 삭막한 대도시 어딘가에서 카나는 기이한 모험을 거듭한다. 초현실적 시공간으로의 전이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끝없이 추락하다가 목격하는 현실을 닮은 평행세계처럼 상상해도 무방할 테다.
의미심장한 장치가 적지 않게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미비아의 사막>은 정치·사회적 주제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도, 시사 비판을 전면에 내걸지도 않는다. 주인공의 혼란이 그저 개인의 특수성으로만 미루기 힘든 배경이 제시되긴 해도, 그렇다고 환경이 문제라는 편의적 기준을 선택할 생각은 감독에게 전혀 선택지로 고려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카나가 처한 혼란의 밑바닥엔 어떤 불합리가 잠재되어 있는지 도입부의 상징적인 몇몇 찰나가 실마리를 제시한다. 감독은 다 고려하고 계획했음이 분명하다.
주인공은 오랜만에 동창과 만난다. 시끌벅적하게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에서 테이블마다 수다가 한창이다. 친구는 파르페를 맛있게 먹으며 얼마 전 자살한 친구가 죽기 전날 영상통화를 걸었다며 가십처럼 이야기한다. 카나는 그런 태도에 태클을 걸거나 하진 않지만, 물끄러미 친구를 (그리고 화면에 집중된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빤히 응시한다. 무표정한 눈빛이 석연치 않다. 한편, 옆 테이블에선 사회문제를 요란하게 토론하던 젊은 남자들이 음담패설로 갑자기 기운다. 다들 상대방과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만, 도리에 어긋난 언행을 멈출 생각이 없다. 그저 지나가는 풍경으로 보다가도 문득 그녀가 응시하는 세계는 참 기괴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지만, 관객이 별로 의구심을 품지 않고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 대도시의 풍경은 모종의 결벽과 고민을 한가득 끌어안은 야생의 카나에겐 다르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약간의 단서로 유추하는 그녀의 소수자 정체성도 가미된다. 겉과 속이 다르고, 전심전력으로 상대에게 진실하지 않은 채 적당하게 가면을 쓰는 관계는 구토하듯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안전한 곳을 명확하게 짚지 못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야수, 바로 주인공이다.
낯선 영화로의 모험
▲<나미비아의 사막>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카나는 때로는 딱 그 나이 또래 청춘 로맨스의 엉뚱발랄한 주인공처럼, 때로는 감춰진 세상의 비밀을 찾고자 파멸을 불사한다. 변화무쌍한 그녀는 마치 경이로운 환상동물, 뷰티풀 몬스터처럼 그려진다. 화장과 스타일만 조금 바꾼 채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면서, 그야말로 '배우의 얼굴'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캐릭터를 아로새긴다. 코를 뚫고 우마왕 코스프레를 하건, 쭉 뻗은 팔다리로 처절하게 격투를 벌이건 전부 다 카나의 다면성으로 수렴된다.
실로 기이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일정 순간부터 관객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20대 배우로 손꼽히는 카나 역의 배우 카와이 유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되고야 만다. 그래서 <나미비아의 사막>란 영화가 그 자체로 한참 물이 들어올 때 노 젓듯 소처럼 부지런하게 일하는 이 촉망받는 배우의 연기 포트폴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배우를 주근깨 가득한 안경 소녀 '킥보드'로 봉인해 놨던 <썸머 필름을 타고!>의 제작진은 실로 대단한 위업을 이룬 셈이다.
물론 요즘 한창 부흥기를 맞이한 일본영화에 카와이 유미 외에도 기대주가 수두룩하지만, '클래스'가 다르다고 과장 조금만 보태 언급할 정도로 이 작품에서 카나라는 캐릭터는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생채기처럼 남을 테다. 그만큼 '주화입마' 위험을 감수하고 몸과 마음을 내던지며 화면을 자기 것으로 꽉 채우는 연기를 톱스타 반열에 막 오르기 시작한 젊은 여배우에게서 찾기란 지극히 희귀한 경우다.
딱할 정도로 맘고생이 심한 카나의 신-구 남자친구를 소화한 칸이치로와 카네코 다이치 역시 충분히 합을 감당해 낸다. 추상적인 심리극 전개에서 배우들이 지탱할 몫은 실로 지대한데 빈틈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물론 10대 후반에 이미 사자후를 터트렸던 야마나카 요코 감독의 역량이 키임은 명백하다. 이 놀라운 영화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극장에서 재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관객의 뇌리에 투척해버린다.
종막을 장식하는 어떤 장면은 너무나 초현실적이라, 관객을 또 다른 미궁으로 휘감고 들어간다. 무심하기에 너무나 쐐기처럼 박히는 멋들어진 에필로그다. 이제 고작 1997년생 기대주 감독이 창조한 기이한 청춘 성장 로맨스는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현실 세계를 재구성해 천지창조를 재현하는 영역으로 관객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기에 모자람이 없다. 구구절절 글로 서술하기보다 극장에서 벌어질 낯선 만남을 주저하지 말라고 관객을 등 떠밀고픈 영화다.
<작품정보>
나미비아의 사막
Desert of Namibia
2024|일본|드라마
2025.05.07. 개봉|137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야마나카 요코
주연 카와이 유미, 카네코 다이치 칸이치로
출연 신타니 유즈미, 나카지마 아유무, 카라타 에리카, 시부타니 아야카,
시부야 아사미, 호리베 케이스케, 와타나베 마키코, 이지마 쿠
수입 비하인드 더 씬 컴퍼니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올댓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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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의 사막> 포스터㈜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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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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