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잔디. 자료사진.
야구장 잔디. 자료사진.연합=OGQ

오늘도 '매진'을 기록한 구장은 환호로 들끓는다. 치어리더가 무대를 달구고, 경기장 전광판은 화려한 그래픽을 쏟아낸다. 1루 응원단상에선 음악이 울려 퍼진다. 역시 지난해 10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답다. 그러나 이 뜨거운 '야구 경기'를 완성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관중석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구단 소속이 아니다. '하청'이다.

프로야구 구단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경기를 '주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운영을 외주업체에 맡긴다.

치어리더 팀은 대행사 소속이다. 경기장 이벤트 기획과 진행을 담당하는 운영 스태프도 대행사 소속이다. 경기장 내 매점, 굿즈 판매 부스, 포토카드 관리 인력, 심지어 구단 공식 유튜브 채널 제작자도 외주다. 심판과 구단 핵심 프런트, 그리고 선수를 제외하면, 야구 경기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구단 소속 직원이 아니다.

물론 이 방식은 '비용 효율적'이다. 인건비를 고정비로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시즌이 끝나면 계약을 종료하면 된다. 그러나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책임' 문제를 흐린다.

팬들은 구단 이름을 보고 경기를 소비하지만, 구단은 '운영상의 하자'가 생기면 책임을 외주업체에 미룬다. 하청-재하청 구조 속에서 임금 체불, 노동환경 방치, 성희롱 문제가 터져도, 구단은 "구단 소속이 아니다"라는 말로 한 발 물러선다. '하청업체'라는 완충지대는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책임도 흐리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동

치어리더는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서지만, 급여는 대행사로부터 받는다. 경기당 일당으로 지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마저도 저임금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최근 필자와 익명 전제 인터뷰에 응한 치어리더들은 하나같이 "응원 단상에 서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일당이 터무니 없이 낮은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털어놨다. 치어리더 대행사를 운영하는 관계자 역시 "매년 최저시급은 오르고 있지만, 구단이 우리에게 배정하는 예산은 그만큼 오르지 않고 있다. 저임금 문제로 치어리더를 빨리 그만두는 사람도 많아 항상 골머리를 앓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022년 한국시리즈 시작 전, SSG랜더스필드에서 청소를 맡은 미화원들의 모습을 찍은 것. (사진은 기사와 무관합니다)
2022년 한국시리즈 시작 전, SSG랜더스필드에서 청소를 맡은 미화원들의 모습을 찍은 것. (사진은 기사와 무관합니다)황혜정

경기장 내 이벤트 진행 요원들은 비정규직 단기계약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노동은 '팬 경험'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지만, 이들의 근로환경은 경기가 끝나면 곧 잊힌다.

하청업체 직원들은 종종 장시간 야외 노동에도 별도의 수당을 받지 못한다. 특히 우천 취소 시 무급, 장시간 노동에도 시간외 수당 미지급 등은 업계의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팬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만, 크게 인지하지 않은 채 '구단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비한다. 하지만 서비스의 최전선에 선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

"추가 수당 안 주던데요?"

필자가 야구장에서 만난 다수의 경기장 안전 요원 역할을 맡은 아르바이트생들은 하나같이 경기가 연장전으로 갈 때 추가 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수도권 한 야구장에서 만난 아르바이트생 A씨는 "평일 오후 6시 30분 경기면 오후 3시 20분까지 야구장으로 출근한다"며 "경기가 연장으로 가 오후 9시 30분쯤 끝났는데, 뒷정리까지 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탄 시각을 봤더니 오후 10시가 넘었다"고 했다. 그러나 추가수당은 없었다.

A씨는 이날 약 6시간 40분 근로를 했지만, 일당은 최저시급을 간신히 넘긴 금액이다. 이마저도 세전 가격이므로 통장에 들어오는 일급이 일당에서 3.3% 세금이 떼인 채로 들어오면 최저시급이 안 될 때도 있다. 실제로 한 외주 업체는 필자와 통화에서 "(평일 오후 6시 30분 시작 경기일 경우) 오후 10시 30분 안에 끝나는 게 일급 지급 기준"이라고 밝혔다.

환경 미화원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스포츠 전문지에 재직했을 시절, 구단에서 일하는 미화원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한 구단이 고용한 청소 외주 업체 미화원 인원은 총 12명. 이들 12명은 외주 업체 소속 정직원이었고, 포스트시즌 같이 바쁜 날에는 아르바이트생 8명을 추가로 뽑아 총 20명이 구장 전 구역을 청소한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에 응한 미화원 B씨는 "경기 시작 4시간 전에 출근해 20명이서 2만 석이 넘는 좌석을 하나하나 다 닦는다"고 했다. B씨는 관중석 의자를 닦은 뒤, 테이블, 광고판까지 깨끗이 물걸레질을 했다. B씨는 "청소를 마치고 쓰레기를 처리하면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자정을 넘긴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2시 경기가 잡힐 때면, 오전 7시까지 출근하기도 한다. 잠을 5시간도 못 자는 셈"이라고 말했다.

'프로야구 산업'이라는 이름의 외주화

 서울 고척스카이돔 전광판. (사진은 기사와 무관합니다)
서울 고척스카이돔 전광판. (사진은 기사와 무관합니다)키움히어로즈

야구는 이제 단순한 경기가 아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시구, 시타, 중계 카메라 연출, 팬 이벤트, SNS 콘텐츠 제작까지 모두 '패키지'로 묶여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된다.

그러나 이 화려한 패키지의 제작자는 대부분 외부 인력이다. '야구를 만드는 사람들'은 야구장 바깥에서 소모되고 있다. 구단은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브랜드를 지탱하는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은 팬들에게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없다. 그들의 노동은 공식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

구단 전광판 오퍼레이팅을 담당했던 C씨는 필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구단은 우리들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소연했다. 전문지식과 정확성이 필요하지만 계약직이어서 경력을 쌓지 못하고 고용 불안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

C씨는 "전광판을 담당하는 이들은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위원과 합을 잘 맞춰야 하고, 경기 규칙, 선수 이름 등 야구에 관한 많은 것도 알아야 한다"라며 "우리 모두가 담당하는 팀에 애정이 있어서 박봉임에도 공부도 따로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계약기간 2년이 다 되어 갈 때면 불안해진다. 씁쓸한 현실"이라고 전했다.

이들을 '비정규', '하청'으로만 관리하는 한, 산업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낮은 처우, 불안정한 고용, 책임 회피 구조는 결국 팬 경험의 질과 경기 산업 전체의 신뢰성을 갉아먹는다.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일부 직무에 대해 직접 고용을 하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가 뛰고 있는 'LA다저스'의 경우, '블루 크루'라는 명칭으로 경기장 내 이벤트 진행, 팬과의 교감, 사진 촬영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는 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구단 마케팅 부서로 직접 고용된다. 또 일부 해외 구단은 직접 고용 대신, 하청업체에 대해 최소한의 근로기준 준수 의무를 부과하는 조항을 삽입하고 있다. '책임의 외주화'를 줄이기 위해서다.

이와 관련해 한 프로야구단 관계자는 기자에게 "리그의 규모 차이 아닐까 싶다. 미국 같은 경우는 규모가 워낙 크지 않나. 반면, 우리나라 작은 리그들은 여전히 구단 직원 한 명이 운영도 담당하고, 경기 중엔 전광판도 돌리고, 조명도 켠다"라고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규모가 MLB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뜻이다.

이어 "프로야구의 경우, 경기가 아무리 길어봤자 3월부터 10월까지만이지 않나. 이들 모두를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면 경기가 열리지 않는 4달 간의 비시즌 동안 월급 지급 부담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한국 프로야구 역시 질문하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 야구를 만드는 사람들을 '하청'에만 맡겨도 좋은가. 팬이 경기를 소비하는 이유는 '구단'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이다. 그 신뢰를 진정 지키려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동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프로야구는 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구단이 '팬 경험'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경험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야구를 사랑한다면, 야구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도 존중해야 한다. '하청'만으로는 프로야구의 미래를 지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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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치어리더 저임금 하청업체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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