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챗 GPT와 A.I.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꾼다며 미디어가 들썩인다. 대학가에선 시험과 과제물에 챗 GPT를 이용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매일 수백 번 들여다보는 SNS 프로필 창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풍으로 자동 변환된 이미지가 넘친다. 모든 게 너무 쉽고 매끈하게 순식간에 벌어진다. 온갖 특수효과를 쉽게 활용 가능한 세상에서 아날로그 방식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한계를 초월해 곳곳에서 활용 중이다. 3D 입체효과를 기본 탑재한 구동 엔진 프로그램 덕분에 불과 몇 년 전과 비교 불허로 보급된 상태다. 이제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 캐릭터가 숨 쉬며 생활하는 것처럼 활동하며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현실과 가상 경계가 허물어지고 심지어 대체하리라 예언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렇게 다들 '멋진 신세계'를 예찬할 때 휙휙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벅찬 이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전통적 수작업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드문 이들이 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축적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기반해 실시간 완성하는 시대에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옹고집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은 물론 영화의 기원에 충실한 태도다. 과거부터 전승된 인형극의 원리를 '활동사진'으로 옮긴 셈이기 때문이다. 오브제를 제작하고 이를 천천히 움직이며 사진을 찍은 다음 1초에 24/25장씩 연결해 '움직임'을 창출한다. 종일 작업에 매달려도 극장에서 보는 분량으로 치면 10초 남짓이 고작이다.

비효율의 극치인 작업에 왜 매달리는 걸까? 전통도 좋지만, 이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물음표 던질 관객에게 호주 출신 관록의 애니메이션 감독 애덤 엘리어트의 신작 <달팽이의 회고록>은 묵직한 답을 제시한다. 대체할 수 없는 전통 방식 애니메이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느리지만 전진하는 인생 예찬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해피송

친구 '핑키'의 임종을 지켜보던 '그레이스'는 애완 달팽이 '실비아'에게 자신의 그동안 삶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그는 생의 출발점부터 평범한 이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험난한 시간을 헤쳐 왔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미숙아로 태어난 그레이스는 선천적 안면장애인 구개열을 짊어지고 세상과 만났다. 게다가 엄마는 그레이스와 일란성 쌍둥이 오빠 '길버트'를 낳는 과정에서 건강을 해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주인공은 엄마의 품도 채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축복받아야 할 탄생부터 기구한 운명에 휘말린 그레이스는 늘 병치레에 시달렸고, 홀로 남매를 돌봐야 할 아빠 역시 사고로 하반신 불구 상태다. 삶의 낙을 잃은 아빠는 점점 술에 의존하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수면무호흡증을 앓기 시작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나날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래도 우애는 깊고 함께 하는 추억은 나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학교에서 외톨이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할 때는 늘 오빠 길버트가 동생을 지키고 나섰다. 그러나 아빠까지 끝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남매는 따로 입양되어 헤어지게 된다.

하필이면 광대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반대편으로 떨어져 살게 된 그레이스와 길버트 남매는 혈육을 향한 그리움이 사무친 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간혹 오가는 편지만이 두 사람을 지탱하게 해주는 위안이자 동력이 된다. 그레이스는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해 달팽이에 집착한다. 자신이 수집하고 기르는 달팽이처럼 작은 방에 틀어박혀 세상으로 나가길 겁낸다. 그렇게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시간 속에서 그레이스는 우연히 괴짜 할머니 '핑키'를 만난다. 핑키는 그레이스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준다.

물론 그레이스의 수난은 아직 한참 남았다. 영혼의 단짝 길버트 오빠는 편지에 내용을 다 알리지는 않지만,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고통을 어떻게 도울 수 없다는 좌절이 내내 그를 괴롭힌다. 핑키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싶었을 정도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펼칠 수 없는 자괴감은 그레이스를 더욱 안으로 숨어들게 만든다. 그로 인한 여러 후유증은 점점 한계로 몰아간다. 조급해진 그레이스는 자꾸만 실수를 일삼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벼랑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생애는 어떻게 반전할 수 있을까?

세상 곳곳의 소수자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해피송

애덤 엘리어트 감독의 작업을 처음 만난 건 2004년 미국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단편 <하비 크럼펫>이었다. 입소문을 탄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잊을 수 없었다. 신경 장애를 선천적으로 안고 태어난 주인공 '하비 크럼펫'의 삶은 기구함을 넘어 마치 절대자가 악의로 시험하듯 거듭 시련으로 넘쳐난다. 길을 걷다 벼락을 맞고, 사고로 고환을 잃는 데다, 치매 증상까지 발생한다.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고통 속에도 생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는 주인공의 태도가 감흥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몇 년 후 감독의 이름이 가물가물해지던 참에 첫 장편 소식이 들려왔다. 2009년 공개된 <메리와 맥스>다. 해당 작품 역시 평범함과는 까마득히 먼 소재였다. 가정에 소홀하고 자기 한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자격 미달 부모가 제대로 돌보지 않는 8살 소녀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 중년 남자의 22년간 이어진 펜팔 사연을 통한 나이 초월 우정과 고난 극복의 서사가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메리'와 펜팔 상대 '맥스'가 각자 사춘기와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견디는 과정이 감동적인 작업이었다. 2011년 국내 개봉했지만, 낯선 애니메이션은 큰 주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감독의 신작 <달팽이의 회고록>은 변함없이 우리가 흔히 지나치거나 심지어 외면하기 일쑤인 사회 곳곳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야말로 태어난 게 원망스러울 지경인 변두리 소외된 인생들이 애덤 엘리어트의 작품 세계에선 주역이 된다. 감독 본인과 가족들의 대개 감추고픈 사연들, 세상을 보는 특별한 시선으로 포착한 이웃들의 애환을 기어코 전면에 내세워 관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길 권한다. 두 번째 장편에서 그런 태도는 한층 더 깊게 심화한다.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난 주인공에겐 빈곤한 가정 형편이 시작부터 주어진다. 그래도 가족의 사랑으로 견딜 만했지만, 잇달아 찾아온 이별은 이제 마음의 문마저 닫게 만든다. 그렇게 상처를 품은 청소년을 형식적 입양과 위탁 돌봄만으로 치유할 수 없음을 소리 없이 웅변한다. 남매 중 그레이스는 겉으론 별다른 문제가 없는 청소년기를 보낸다. 양부모는 입양된 그레이스를 딱히 학대나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그들은 그레이스에게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데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로 인해 방치된 그레이스의 정서는 우울증과 충동적 도벽으로 이어진다.

오빠인 길버트의 삶은 겉으론 크게 부족할 것 없는 그레이스에 비교해 훨씬 심각했다. 너무 방임형이라 문제인 여동생의 양부모와 달리, 길버트를 입양한 가족은 광신도에 가까웠다. 신흥 교단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이 가족은 길버트를 노동력이자 신자로 착취하는 데에만 집착한다. 신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는 극단주의 개신교 계열 폐쇄적 공동체의 전형 격이다. 오빠의 고통을 간접 체험하던 그레이스는 의지할 곳을 갈망하다 거듭 조급한 선택으로 자신을 더 힘들게 몰아간다. 중반쯤 지나면 관객조차 이 남매의 운명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선택, 클레이 애니메이션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
<달팽이의 회고록> 스틸해피송

쌍둥이 남매의 기구한 성장 과정과 우연처럼 깃든 변장한 천사들의 도움이 생애주기로 펼쳐지는 서사는 풀기 쉽지 않은 작업이다. 대개 실사영화에선 배우의 연기력에 의존하지만, 이 경우 주인공 활약 위주라는 한계가 발생한다. 이를 과감히 벗어나 표현력을 극대화하려는 작가의 선택은 애니메이션, 그것도 인형극 전통에 바탕을 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당팽이의 회고록>은 그중에도 고난도인 '클레이 애니메이션' 장르를 택했다. 즉 영화 내내 화면을 가득 메운 캐릭터와 배경 모두 찰흙으로 손수 빚었다는 뜻이다. 일일이 제작한 오브제가 7,000개에 달한다. 그야말로 사람 갈아 넣은 작업이다. '빨리빨리!' 외치는 시대에 터무니없이 느림보로 보이겠지만, 그 결과물은 자기복제로 점철되어 금방 싫증나는 요즘 CG 범벅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작품 제작엔 8년이 소요되었다. 찰흙 인형과 소품을 공들여 제작하는 것도 수고가 어마어마할 텐데, 이걸 활동사진으로 변환하기 위해 미세 조정하는 작업도 뒤따랐다. 매일 낮과 밤 매달려도 고작 5~10초 분량만 촬영할 수 있었다. '겨우?' 소리가 나오겠지만, 1초에 24장 사진을 찍어야 겨우 조건을 채운다. 수백수천 번 동작을 조절하며 공들여 촬영한 결과다. 장인정신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작업이다.

왜 그런 고생을 자처한 걸까?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내용을 온전하게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것이 최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합리적 선택의 결과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나 3D 프린터로 복제한 매끈하고 세련된 질감으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세상에 외면당하고 따돌림을 받는 이면을 구현할 수 없다는 단호한 판단,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차이로 가득하다는 통찰이 어우러진 셈이다. 오브제 하나라도 같은 게 없는 클레이 방식만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다.

무엇 하나 똑같지 않은 세상의 풍경을 <달팽이의 회고록>은 핑키 할머니의 온몸 가득한 주름살, 그레이스의 방을 가득 채운 달팽이의 나선, 집착적인 수집 병을 가진 작품 속 인물들의 공간으로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숨 막힐 것 같은 배경은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으로 기능한다. 그런 장벽을 스스로 뚫고 세계로 향하는 다리를 열어가는 주인공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 싸구려 감동이 아니라 진심의 울림을 자아내는 데에는 본 작품의 선택이 최상의 조합임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의심하지 않게 될 테다.

<작품정보>

달팽이의 회고록
Memoir of a Snail
2024|오스트레일리아|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
2025.04.30. 개봉|94분|15세 관람가
감독 애덤 엘리어트
목소리 출연 새라 스누크, 에릭 바나, 재키 위버, 코디 스밋 맥피, 도미니크 피뇽 외
수입/배급 해피송

 <달팽이의 회고록> 포스터
<달팽이의 회고록> 포스터해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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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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