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SF 드라마 <닥터 후>가 돌아왔다. 외계 행성 '갈리프레이'를 떠나온 미지의 외계인 '닥터'가 지구인을 데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모험을 떠난다는 전제의 <닥터 후>는 1963년부터 1989년까지 26개의 시즌을 2005년부터 2022년까지 13개의 시즌을 방영한, 명실상부 영국의 '국민 드라마'다.

2025년 현재의 <닥터 후>는 디즈니와 손을 잡고 대대적인 재단장을 거쳐 '시즌 2'라는 이름으로 방영되고 있지만, 드라마 전체로 따지면 31번째 시즌인 셈이다. 올해로 방영 61주년을 맞은 이 SF 드라마는 어떤 혁신을 시도했길래 오늘날까지도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본작의 오랜 역사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그리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플롯에서 그 원인을 찾아본다.

 드라마 <닥터 후> 구 시즌 12 스틸컷
드라마 <닥터 후> 구 시즌 12 스틸컷BBC

<닥터 후>의 진보성

<닥터 후>는 1963년 당시에 흔치 않던 여성 프로듀서 '베리티 램버트'와 유대계 캐나다인 제작자 '시드니 뉴먼'이 힘을 합쳐 탄생한 작품이다. 방영 초기부터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주관이 강력하게 개입된 셈이다.

실제로 인류와 흡사하게 생겼지만 완전히 다른 외계 종족인 주인공 '닥터'가 인간 사회를 흥미롭게 여기는 모습은 '정상적인' 세상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타자화된 시민의 시선과 흡사하다. 감정을 잃은 로봇 군단 '사이버맨'을 통해 사랑과 공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공기마저도 결제 이후 사용할 수 있는 외계 행성을 그리며 폭주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닥터 후>도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주인공 '닥터'의 외향이다. 죽음을 겪어도 다른 얼굴로 삶을 이어간다는 '재생성' 설정을 통해 여러 배우가 해당 역할을 거쳐 갔지만, 2017년 이전까지 닥터를 연기한 배우는 전부 백인 남성이었다. 이후 여성 배우 조디 휘태커가 13번째로 닥터의 배역을 이어받지만, 고착화된 캐릭터성에 익숙해진 일부 팬들로부터 강한 반발에 시달렸다.

하지만 <닥터 후>는 온라인상의 백래시(backlash)에 굴하지 않고 15번째 닥터 역할에 흑인 배우 슈티 가트와를 기용하면서 다양성을 견지하겠다는 견해를 굳건히 했다. 현재 <닥터 후>의 쇼러너인 러셀 데이비스 역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게이로, 2024년 6월 9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본작의 진보적인 가치관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드라마 <닥터 후> 시즌 1 스틸컷
드라마 <닥터 후> 시즌 1 스틸컷디즈니+

지적을 수용하되, 퇴보하지 않는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돌아온 <닥터 후>의 새로운 시즌 1은 그의 공언대로 '역사의 흐름에 발맞추는' 변화를 겪는다. 신체적 장애가 도덕적 흠결로 이어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묘사되던 시리즈의 악당 '다브로스'의 외견을 과감히 바꿨다. 드라마 <하트스토퍼>로 잘 알려진 트랜스젠더 배우 야스민 피니를 스페셜 에피소드의 공동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보수적인 팬층뿐만 아니라 본작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팬들에게서도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야스민 피니의 캐릭터 '로즈'는 첫 등장에서만 중요하게 그려지며, 이후에는 플롯에 전혀 이바지하지 않는 이야기의 외곽으로 밀려난다. 진보성을 강조하기 위해 '토큰 캐릭터(작품의 홍보에만 사용되고 버려지는 부가적 캐릭터)'를 사용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존재했다.

이러한 비판을 인식한 듯, 새 <닥터 후>의 시즌 2는 캐릭터의 소수자성을 대사 등의 장치로 직접적으로 내보이기보다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들어 수용한다. 새 공동 주연인 '벨린다(바라다 세투 분)'가 합류하며 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유색인종으로만 이루어진 주연 팀이 구성됐지만, 이 사실은 캐릭터로 드러나는 대신 195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에피소드에서 '인종 분리 정책'을 경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더불어, 트랜스젠더 캐릭터의 운용이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자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작가 주노 도슨을 고용하여 발전 의지를 내보였다. 이처럼 <닥터 후>는 작품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을 부정하거나 반대 여론을 의식해 퇴보하는 대신, 느리지만 담대하게 진보하는 방향으로 '혁신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 <닥터 후> 시즌 2 스틸컷
드라마 <닥터 후> 시즌 2 스틸컷디즈니+

자기반성을 또 다른 기회로

<닥터 후>의 이러한 발전 방향성은 변화하는 인물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작은 외계인 '닥터'와 그가 선정한 인간 동행자 '컴패니언'이 함께 모험을 이어가는 구조다. 그동안 대부분의 컴패니언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과 '낯선 인도자' 닥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닥터 후> 시즌 2의 컴패니언 '벨린다'는 평범하게 살던 자신의 앞에 나타난 닥터를 경계한다. 시리즈에서 보이는 모험 역시 적극적인 탐방의 결과가 아니라, 벨린다를 집에 돌려보내려는 과정에서 우주선이 불시착해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조사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닥터를 납치범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는 선택이었지만, <닥터 후> 시즌 2의 플롯은 작품의 오랜 역사를 '잘못된 것'으로 여기거나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본작의 닥터는 자신의 행보에 대한 벨린다의 지적을 어색하게나마 수용하면서 벨린다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외계인 닥터의 성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기반성적인 모습마저도 흥미로운 요소로 탈바꿈하면서, 익숙하거나 식상한 구조를 타파한다.

이처럼, <닥터 후>는 첫 방영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작품의 역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시도하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점이 본작의 '장수 비결'이 아닐까. 작품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여곡절이 많은 <닥터 후>지만, 그 덕분에 아직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시초적 SF 모험 드라마의 내공과 장르의 선두 주자가 선보이는 새로움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면 디즈니 플러스에서 <닥터 후>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드라마 닥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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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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