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F91> 포스터
<기동전사 건담 F91> 포스터(주)미디어캐슬

지구의 운명을 건 숙명의 라이벌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의 최종 결전 이후로 30년이 지난 우주세기 0123년. 하지만 여전히 인류는 지구 거주민과 우주 이민자 사이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기존의 우주식민지 외에 새롭게 달과 지구 사이 안전지대에 신규 거주 구역이 '프론티어' 사이트란 이름으로 건설되는 중이다.

시북 아노는 프론티어 IV 거주 구역에서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마침 축제가 열리고 떠들썩하던 때, 우주 이민의 이상국가 건국을 주장하는 '코스모 바빌로니아'의 군대 '크로스본 뱅가드'가 프론티어 IV 정복을 위해 기습을 감행하고, 이를 수비하려던 지구연방군 주둔군과 시가전이 벌어진다. 격렬한 전투 와중에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고 평화롭던 동네는 아비규환에 빠진다. 시북과 일단의 피난민은 가까스로 출항 직전이던 연방군 훈련함 '스페이스 아크'에 탑승해 프론티어 I로 향하지만, 전쟁의 불길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연방정부가 코스모 바빌로니아 대응을 등한시하는 가운데, 기세등등한 크로스본 뱅가드에 맞서기엔 역부족인 프론티어 사이트 주둔군에 가세한 저항세력은 피난해 온 청소년들까지 억지로 동원한다. 로봇 조종이 가능했던 시북은 완성되긴 했지만, 가동 불능이던 연방군 최신 모빌슈트 'F91'에 떠밀려 탑승하게 된다. 사실은 일에 몰두해 가족 곁을 떠났던 시북의 어머니가 개발에 참여한 기체였다. 그렇게 안전지대를 찾아 끝없이 도주하는 스페이스 아크와 모종의 비밀작전을 계획한 크로스본 뱅가드의 틈새에서 시북은 전투에 뛰어든다.

현실의 민주주의 위기와 권위주의 대두를 예언하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로 자신이 문을 연 건담 시리즈에 마침표를 찍으려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추진력을 만들어 버렸다. 기왕 그렇게 된 것, 차라리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지로 3년 후 감독은 신작을 내놓기에 이른다. 예전 시리즈와 설정은 연결되지만, 일부러 한 세대가 온전히 지나 과거 기억이 희미해진 우주세기 123년을 기준점으로 이야기는 출발한다.

영화 속 지구연방은 겉으론 평화롭다. 그러나 과거 거듭된 전쟁의 근본 원인이 지구의 기득권에만 안주하며 우주 이민자를 착취하는 연방정부의 제국주의적인 태도, 정작 우주 이민은 자급자족 가능한 조건으로 불균형한 경제 구조라는 진실은 전혀 개혁되지 않았다. 분쟁의 불씨는 위태로운 평화 아래 잠복해 있었다. 그저 점화되기만 기다리던 셈이다.

지온의 선민사상과 군국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건, 크로스본 뱅가드의 '귀족주의'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 위주로 강제 이주를 당한 우주 이민에 구시대 귀족이 포함되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신흥세력이 주장하는 귀족주의 정치사상은 어떤 함의를 지닐까? 정작 그들이 타도하려는 대상인 지구연방은 문민 통제가 이뤄지고 연방 의회가 최고결정권을 지닌 형식상 큰 하자도 없는 민주정 체제인데 말이다.

귀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타락하고 이권 집단 담합에 놀아난 까닭에 기득권층인 지구 거주자들의 대리자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정작 지구를 먹여 살리는 건 우주 이민이 생산한 자원과 노동력인데 정치적 지분은 보장을 받지 못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합당하게 들린다. 이미 1세기 동안 의회 내에서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해 왔고, 군사적으로 분리독립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극단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다시 나올 때가 된 것이다.

크로스본 뱅가드는 타성에 젖은 연방군이 군비 확충에 소홀한 틈을 타 신기술 개발에 매진해 기존의 로봇 병기보다 2/3 크기로 작으면서도 고성능인 신형을 개발해 군사력을 확충하고, 군사적 대결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주 이민이 지구연방에서 독립해 이상국 '코스모 바빌로니아'를 세우려 한다. 민주주의 대신에 플라톤의 철인지배 사상을 우주판으로 옮긴 듯한 '귀족'이 지배하는 과두정이다.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사상인 셈이다.

그들의 지배이념은 일단 겉으로는 제법 충실하게 구현된다. 시가전에서도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하거나 고위층이 솔선수범해 전투에 참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오히려 민간인을 방패로 삼거나 위험에 노출하는 건 연방군인 경우가 흔하다. 청소년을 강제 징집하거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무리한 전투를 벌이기 일쑤다. 아군과 적군으로 선악이 대비하게 마련인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모호하고 불분명한 구도는 드물지만, 건담 시리즈는 현실에서 오히려 쉽게 발견되는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결국에 무능하고 부패한 구체제 vs 청교도적 태도의 극단주의 신흥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본질을 벗어난 전쟁에 희생당하는 소시민들의 비애가 남는다.

 <기동전사 건담 F91> 스틸
<기동전사 건담 F91> 스틸(주)미디어캐슬

미래를 짊어진 청소년의 눈으로 본 전쟁과 어른들의 세계

<기동전사 건담 F91>은 '퍼스트 건담'의 한 세대 후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에 걸맞게 나선으로 순환되는 설정이다. 온갖 명분과 사상이 충돌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에 내몰리고, 그 과정에서 생사를 오가는 성장물의 장르 특성을 온전히 띤다. 여기에 한창 일본 사회에서 기성세대에 의문을 품던 청소년들의 의식이 짙게 녹아든다.

시북의 어머니는 인류의 기술 진보에 큰 전기가 될 바이오 컴퓨터 개발에 인생을 걸었지만, 개인의 연구로는 이를 완성할 수 없기에 연방군에 협력해 연구에 매진하고자 가족을 두고 떠났다. 시북이 한눈에 반한 동급생 '세실리'는 실은 가족사에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시작된 거대한 전쟁에서 한쪽의 정치적 구심점이 될 출신과 자질을 가졌다. 당연히 이용하려는 시도에 포위된다. 하지만 시북이나 세실리나 그저 자신들이 온전히 인생을 개척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장대한 전쟁 틈에서 부모 세대와 주인공들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한다.

그러나 근래 한국 사회를 뒤덮은 세대간 항쟁의 이분법적 구도는 본 작품에서 통하지 않는다. 연방군 내에도 민간인 보호에 목숨을 걸고 군인의 의무를 다하는 상식인이 적지 않고, 크로스본 뱅가드 진영에도 진심으로 시민의 안위를 염려하는 혁명가가 존재한다. 반대로 우주에서 벌어진 전투에 나 몰라라 무사안일하게 휴가를 즐기는 지구의 정치가, 비뚤어진 선민사상으로 지구건 우주건 무능력자는 살 가치가 없다고 믿고 '숙청'하려는 과격파가 양 진영에 거울처럼 위치한다.

시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연방정부의 구태로 세력을 키운 크로스본 뱅가드 내 과격파는 '맬서스 트랩'을 판박이로 삼은 비밀 계획을 실행하려 한다. 귀족주의 선민사상은 곧 열등한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는 비인간적 시선으로 삽시간에 변질하고, 생명보다 자원이 더 중시되는 왜곡으로 치닫는다. 거대한 연방군에 맞서 신국가 수립에 필수 자원 확보는 절실하지만, 애초 과잉 인구와 자원 부족으로 촉발한 지구권 분쟁이기에 강제 인구 감소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말이 좋아서 인구 감소일 뿐, 구시대의 제노사이드가 여전히 '최종 해결책'으로 제시된 셈이다. '히틀러의 꼬리'처럼.

제작 당시엔 그저 먼 미래 SF로 취급되던 영화 속 비밀병기 '버그'가 요즘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크로스본 뱅가드 과격파는 비밀작전을 통해 우주의 자원과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연방군과 전쟁에서 부양하고 보호해야 할 대규모 인구는 장애물로 여긴다. 우주 거주 구역과 주요 기간시설은 접수하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점령지 시민은 어떻게 안 받을 수 없을까? 그 대안은 오직 인간만 골라 살상하는 무인 병기다. 21세기 전쟁터를 지배하는 '드론'의 선구적 개념이 <기동전사 건담 F91>에 흑막으로 등장한다. 감독도 상상하지 못한 근미래에 벌어지는 현실이 영화를 압도한 격이다.

 <기동전사 건담 F91> 스틸
<기동전사 건담 F91> 스틸(주)미디어캐슬

'리부트'를 노렸으나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건담

새로운 건담 시리즈는 전작 <역습의 샤아>와는 정반대 역할을 맡았다. 일종의 '리부트'를 통해 기존 세계관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는 이야기를 펼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점에서 <기동전사 F91>은 '퍼스트 건담'이라 불리는 첫 번째 건담 시리즈를 마치 거울처럼 닮았다. 아무로 레이를 시북 아노가, 샤아 아즈나블을 자비네 사르가, 세일러 마스를 세실리 페어차일드가 물려받는 식이다. 원래는 그냥 'F91'이던 주인공의 로봇에 이제는 전설처럼 알려진 '건담'을 우연히 붙인 점도 감독이 본 작품에 담으려 한 의의를 은유한다.

그러나 거대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건담 시리즈를 종결'하는 피날레로 혼신을 기울인 <역습의 샤아>는 직전 작품 <기동전사 ZZ건담> 미지근한 반응으로 위태롭던 시리즈를 반석에 올려놔 버렸다. 그렇게 된 바에 새로 출발하려던 <F91>은 정작 애매한 평가로 시리즈를 이어가는 데 실패한다. 리부트 출발격 작품이라 후속편이 나오지 않으면 미완으로 마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즘 화제인 건담 최신판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공개 방식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텔레비전 시리즈 전체 줄거리 홍보 겸 초반부만 별도로 극장용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비기닝> 선공개한 것과 <F91> 구성은 동일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작 본편 제작이 무산된 것이다. 단품만 보는 극장판 <F91>은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다 보니 차분히 즐길 틈이 나지 않는다. 캐릭터 감정선이나 주요 국면 변화가 많은 면에서 축약되고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런 탓이다.

그러나 '퍼스트 건담' 원년 제작진이 도원결의하듯 총집결한 <F91>은 아쉬움 속에도 기존과 차별화된 개성과 흥미가 만만하지 않다. 자기복제로 점철된 메카닉 디자인을 벗어난 개성 넘치는 도전과 (기존 자기파괴적 면모로 악명 높던) 청소년 캐릭터들의 긍정적 면모 같은 차별화의 재미를 놓치기 아까운 실체를 30여 년 만에 확인할 시간이다.

<작품정보>

기동전사 건담 F91
機動戦士ガンダム F91
Mobile Suit Gundam F91 Movie
1991|일본|리얼로봇/SF/전쟁 애니메이션
2025.05.07. 개봉(롯데시네마 단독)|120분|12세 관람가
원작/감독 토미노 요시유키
목소리 출연 츠지타니 코지, 토마 유미, 이케모토 사유리 외
수입 ㈜에스피오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배급 ㈜미디어캐슬
기동전사 건담 F91 토미노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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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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