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출 영화가 아이누 족을 다룬 다큐였고, 그 이후로 단편 극영화 서너 편을 만들었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작품 활동을 이어오던 네오 소라 감독은 첫 장편 극영화 <해피 엔드>로 베니스영화제 등 유수의 세계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부친이자 세계적 영화음악가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담은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의 감독으로도 국내에 알려진 그를 2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영화 <해피 엔드>는 제목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와 상황이다. 대지진을 앞두고 국가의 몰락을 점치는 학생들이 전자음악에 심취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정확한 연도는 나오지 않지만 AI를 활용한 감시 시스템으로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고, 시민들을 감시하는 공권력을 묘사하는 등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감독이 묘사하고 있는 일본 사회 분위기가 극우 및 파시즘이 만연하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재일조선인 후손으로 완벽하게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불안정한 신분이고, 그의 친구들 또한 혼혈이거나 귀화 문제로 학교 수업 일부에서 배제당하기도 한다. 코우의 절친 유타(쿠리하라 하야토)를 비롯한 주인공 그룹들은 디제잉과 테크노 음악에 심취해 있고, 유일하게 그것이 이들의 해방구지만 차별화 혐오가 은연 중에 이들 사이에 균열을 낸다.

과거 학창시절 경험, 친구와의 사연 담아

 영화 <해피 엔드>를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
영화 <해피 엔드>를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Aiko Masubuchi

네오 소라 감독은 자신의 어떤 작품들보다 이번 이야기를 가장 빨리 썼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내면에 오래 품고 있었고, 잘 알고 있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제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생각하며 느낀 감정들이 있다. 친구들과의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여기에 제 정치적 성향을 담았다. 3.11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계기로 눈을 뜨게 됐다. 2010년대였는데 여름방학 때마다 시위에 참여하곤 했다. 반원전 운동을 비롯해서 미국 사회에서 그때 시위가 활발했거든.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2012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등 말이다.

아무래도 대학생이다보니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토론이 활발하지 않나. 제가 그런 일련의 문제의식을 주장하면서 친했던 친구와 멀어지기도 했다. 그때 굉장히 슬펐는데 그걸 글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제가 고등학생일 땐 반항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물론 반항심은 있었지. 대학생이 되어 시위에 나가면서 행동하게 됐다. 권력에 대한 저항감은 항상 있었고, 틀린 건 틀렸다고 표현하는 편이다. 요즘 한국도 그렇고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의 시위를 하는데, 일본인들은 갈수록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모습이 없어지는 것 같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심심찮게 일본이 곧 망할 것이라 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곧 들이닥칠 대지진 때문이다. 100년에서 길게는 150년 간격으로 일본 열도를 강타해 온 대지진에 대한 국민적 공포감이 짙게 깔려 있다. 네오 소라 감독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또 언제 대지진이 올까 두려워하는 게 있다"며 "중요한 건 그때 일본이 자행한 일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이 영화의 사상적 배경이었다"라고 말했다.

"조선인 학살을 저질렀던 일본이 그 이후로 얼마나 반성했을까. 전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같은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한다면?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근대국가 개념이 생긴 게 오래되지 않았잖나. 일본인이란 개념도 잘 보면 변해왔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진 일본 제국을 꿈꾸며 한국을 비롯해 천황의 식민이라고 했다가 1947년엔 외국인 등록제를 실시하면서 일본에 사는 일본인과 외국인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그들의 고국으로 강제 송환할 수 있는 분류를 만든 셈이다.

국민과 국가라는 건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의 세계는 자신이 속한 나라의 여권을 가지고, 얼굴을 인식해서 교류하잖나. 국가적 한계에선 그만큼 폭력에 노출되기도 쉽다. 그 경계성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일본 사회도 20년 전에 비해 현재 노동력 다수를 이민자로 채우는 상황이다. 그들은 일본인이 아닌가? 하다 못해 영화에 나오는 톰(아라지)도 혼혈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저보다 일본에서 성장한 시간이 훨씬 길다. 하지만 외형만 보면 일본인으로 인식하기 어렵겠지. 그런 점을 짚고 싶었다."

근미래 감시시스템? "미국, 러시아, 일본 사례 모았다"

 영화 <해피엔드> 관련 이미지.
영화 <해피엔드> 관련 이미지.영화사진진

<해피 엔드> 특유의 종말 분위기에는 테크노를 위시한 전자 음악도 한몫한다. 특히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한 클럽신엔 일본 유명 디제이 유스케 유키마츠(¥ØU$UK€ ¥UK1MAT$U)가 출연해 눈길을 끈다. 클럽에 잠입한 유타와 코우에게 자신의 노래가 담긴 USB를 건네며 음악적 에너지를 주인공에게 전달한다. 평소 테크노 음악을 좋아하기에 자연스럽게 전자음악을 담게 됐다며 네오 소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뉴욕에 머물렀을 때부터 그의 영상을 많이 봤고 팬이었다. 일본에 왔을 때 그의 라이브 무대를 보고 인사를 나눴다. 재밌게도 제가 예술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극장에서 유스케와 마주치게 되더라. 그러면서 친해지게 됐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의 이름을 넣어서 썼는데 출연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셨다.

보통 영화 음악은 해당 장면에서 배우의 감정을 강조하도록 쓰이는데 전 그렇게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코우와 유타가 서른 살이 됐을 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들이 담겼으면 해서 그들이 듣는 음악 자체를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했다. 왜 살면서 현재엔 자기의 감정을 잘 모르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깨달을 때가 있잖나. 자신의 세계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면서 말이다."

안면 인식 시스템을 통해 학생들에게 벌점을 주는 자동화 방식도 인상 깊었다. 이에 대해 네오 소라 감독은 "미국이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하고 있는 시스템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설명했다.

"근미래의 일본이라면 여러 나라에서 하고 있는 사례를 다 모아 정책화했을 거라 상상했다. 세계 곳곳을 보면 근미래의 씨앗들이 있다. SF 소설 작가인 윌리암 깁슨이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불균등하게 배분됐을 뿐'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 말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 감시 시스템을 적용한 교장도 가까이서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니다. 피습당한 일본 총리도 그렇고. 구조 안에서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게 나쁜 정책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비전문 배우 파격 캐스팅의 비밀

 영화 <해피엔드> 관련 이미지.
영화 <해피엔드> 관련 이미지.영화사진진

<해피 엔드>가 처음 공개된 베니스영화제를 기점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품을 접한 관객들 사이에선 새로운 거장 탄생이라는 입소문이 돌고 있다. 첫 장편 영화에 감독 특유의 개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영화적으로 잘 풀었다는 평들은 분명 창작자 입장에선 고무적인 반응일 터. 영화 내용과 배치되는 역설적인 제목과 롱샷과 일시정지를 활용한 촬영 기법, 그리고 주인공 친구 무리인 아타 역의 하야시 유타를 제외하고 대부분 연기가 처음인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를 물었다.

"롱샷(멀찍이 떨어져 작아진 인물을 주변 배경과 함께 조망하는 것)을 사용한 건 솔직하지 않은 이유와 솔직한 이유가 있다(웃음). 서사 안에서 학교라는 작은 사회와 일본이라는 큰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큰 세계가 결국 작은 세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암시지. 근데 솔직히는 제가 고가 다리, 육교 패티시가 있다(웃음).

마찬가지로 제목도 솔직하지 않게 말하면 큰 세계인 일본은 망하지만 주인공들은 우정으로 살아가니 행복하지 않나. 서로 다른 그 두 세계가 맞물리는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하게는 원래 영화 제목은 <지진>이었다. 제가 상상력이 없는 편이라 제목을 잘 못 짓는데 영화 편집 중 일본에 지진이 났었거든. 그래서 더욱 지진을 영화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고민했고, 직감적으로 해피 엔드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결정했다(웃음).

캐스팅에선 제 방침은 무슨 역할이든 맡기면 그 캐릭터가 되는 프로 배우보단 이미 사람 자체가 그 캐릭터에 가까운 사람을 찾자는 거였다.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기적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났지. 비전문 배우라 톤을 맞추는 게 중요해서 워크샵을 꽤 오래 진행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두루 경험하고 있지만 네오 소라 감독은 자신의 DNA는 극영화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기획해 놓은 작품 또한 세 작품이 있다고 한다. 특히나 첫 장편 영화 개봉으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는 데에 그는 큰 기대감을 드러냈다.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했지만,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뜨거운 반응이 있을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다. 이번에 대통령 이슈와 관련해서 한국뉴스를 엄청 봤는데 단시간에 많은 분들이 모여서 시위하고 결국 바꾸게 하는 게 일종의 문화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피 엔드>가 그린 상황이나 감정에 더욱 많이 공감해주실 것 같다."

해피엔드 네오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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