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일본 거품 경제가 최전성기를 누리던 때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 애니메이션계를 양분하는 '재패니메이션'의 대작이 쏟아진 해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오시이 마모루의 <아키라>, 스튜디오 지브리를 대표하는 작품들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와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묘>가 동시에 공개되었으니 말이다. 서슬 시퍼런 일본문화 금지에도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접하던 시절이다.

그 해에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 탄생했다. 서양에선 앞선 세 편과 비교하면 약간 지명도가 낮긴 해도 일본이건 한국이건 열광적인 팬을 보유한 작업이다. 바로 1979년 등장해 로봇 SF 애니메이션의 세대교체를 불러온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최신판이자 1차 완결판에 가까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이하 <역습의 샤아>)다. 당시 이미 10년이 된 거대한 시리즈를 원작자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스스로 종결짓고자 한 작가적 야심의 총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역작으로 작가의 의도에 충분히 부합하는 완성도를 지녔다.

바로 그런 작품이 국내에 늦깎이 개봉을 준비하는 중이다. 37년 만이다. 물론 <역습의 샤아> 역시 볼 사람은 다, 그것도 성지 순례하듯 몇 년에 한 번은 꼬박꼬박 재관람하고 있겠지만 (영화제 상영 빼면) 정식 극장 개봉이 처음이라는 데 오히려 놀랄 이들도 적지 않을 테다.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3D 애니메이션이 넘치는 요즘에 굳이 이 작품을 소환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 진출 후에도 여전한 전쟁 속 숙명의 라이벌, 최종결전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미디어캐슬

무한정 늘어나는 인구와 자원 고갈, 환경 오염에 처한 인류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우주로 이민을 결정한다. 이를 위한 행정력 증진을 위해 지구 연방정부가 탄생하고 인류의 우주진출을 기념해 서력에서 우주세기(U.C.)로 변경한다. 우주세기 1년부터 시행한 이민은 인간이 거주할 거대한 우주 식민지를 설치하는 형태로 실시된다.

한 세기 가깝게 적극적인 이민정책 결과 전체 인류의 8할이 우주에 거주하게 되자, 인위적 이민은 유보된다. 하지만 강제에 가까운 우주 이민 대다수와 달리 지구에 남은 특권층은 이민자('스페이스 노이드')를 차별하며 기득권을 누린다. 불만은 커지고 지구인('어스 노이드') 중심의 연방정부는 군사적 억압으로 일관한다.

우주 식민지 중 분리독립을 꾀하던 사이드 3은 군국주의 국가인 지온을 수립하고 U.C. 0079년 기습 전쟁을 일으킨다. '1년 전쟁'이라 기록된 전쟁에서 국력이 열세인 지온은 우주 식민지 구조물을 지구에 질량 무기로 투하해 수십억의 희생자를 낸다. 간신히 연방군이 승리하지만, 이로 인한 지구와 우주 이민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연방군 내에 극단적 지구 중심주의가 득세하고, 탄압에 저항하는 이민자 중심의 저항세력이 결성해 0087년에 거대한 내전이 발발한다. 여기에 지온의 잔당인 네오 지온도 가세한 3파전이 벌어진다. 지구 극단주의자 '티탄즈'와 여기에 반대하는 '에우고', 네오 지온의 전쟁은 0089년에 일단 끝나지만, 갈등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전쟁의 시간을 헤쳐나온 두 명의 라이벌이 있다. 1년 전쟁 초반, 인간 형태의 전투로봇 '모빌슈트' 개발로 우세를 점하던 지온군 에이스 '샤아 아즈나블', 뒤늦게 모빌슈트를 개발한 연방의 에이스 '이무로 레이'다. 둘은 1년 전쟁 당시 수없이 대결하며 서로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전쟁이 끝나자 전설적인 전쟁영웅으로 유명해졌다.

연방 내전에서 둘은 지구 극단주의에 맞서는 진영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지만, 지구연방의 무사안일주의에 절망한 샤아는 새로 결성된 네오 지온의 총수가 되어 연방에 전쟁을 선포한다. 연방군 특수부대 론도벨의 지휘관이 된 아무로는 샤아에 맞서 십여 년 간 이어진 그들의 기이한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상업주의 변질에 맞서려던 작가적 저항과 그 결말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미디어캐슬

팬이라면 줄줄 암기할 우주세기 역사를 거칠게 정리해 봤다. 2시간으로 압축된 <역습의 샤아>는 미래 인류의 가상 역사를 그야말로 집대성하기 때문이다. 1979년 <기동전사 건담>, 1985년 <기동전사 Z건담>, 1986년 <기동전사 ZZ건담>으로 이어지며 공전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리즈는 '리얼로봇' 애니메이션 선풍을 일으켰고, '건담 프라모델('건프라')'은 나이키 에어 조던 시리즈처럼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황금알 낳는 거위가 된 해당 시리즈가 '어른의 사정'으로 무한히 늘어날 위기에 봉착하자 '창조주'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자신의 손으로 일대기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이전 건담 시리즈는 저예산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제작했지만, 공전의 성공 덕분에 <역습의 샤아>는 감독의 작업 중 드문 예산 여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제 거대한 팬층을 가진 시리즈를 스스로 끝낸다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변 누구도 원할 리 없다. 감독의 중압감은 상상을 뛰어넘고, 그 압박은 주위에 금방 퍼진다. 일본 애니메이션 황금기 내놓으라 하던 애니메이터가 총 집결한 <역습의 샤아> 제작 과정에서 과로와 혹사로 요양하거나 영영 업계를 떠날 정도로 후유증이 이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 결과물은 손으로 한 장 한 장 그리던 2D 애니메이션 궁극의 결과로 드러난다. 지금 보면 저걸 어떻게 일일이 손으로 그렸을지 경탄하는 정교한 원화와 실사 영화를 뛰어넘는 드라마가 어우러진다. 건담 팬이라면 허투루 지나칠 장면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건담 시리즈의 모든 걸 농축한 작업 정밀도를 선보인다. 수십억 우주 이민자가 생활하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 '스페이스 콜로니' 세밀화는 실제 사진처럼 극사실주의로 재현되고,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은 바로 옆에서 관전하듯 입체감 넘친다.

<역습의 샤아>는 그렇게 수준 높은 서사와 화려한 액션이 조화를 이룬 역작으로 감독의 소망처럼 시리즈를 종결하기 모자람 없이 완성된다. 하지만 결과물이 너무 빼어난 까닭에 오히려 팬은 더 열광했고, 대체할 후속에 도전하기보다 안전한 흥행을 꾀하던 제작사와 후원사는 강제 수명연장을 선택한다. 그렇게 10년 만에 깔끔하게 마치려던 원작자의 꿈은 거대한 역설로 귀결된다.

어느새 창조자의 손을 떠나 기업 상품이 된 시리즈는 2025년 현재도 왕성하게 다양한 경로로 제작되면서 거대 '산업'으로 변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모든 변주는 결국 최초의 것들, <역습의 샤아>에 농축된 기원에서 비롯한다. 최신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 지쿠악스> 또한 그 중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전쟁을 겪고 세상 문제에 눈감지 않은 세대의 로봇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스틸㈜미디어캐슬

그래봐야 장난감 팔아먹기 위해 찍어내는 만화영화 아니냐 시큰둥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로봇' 시대를 연 건담 시리즈는 무적의 로봇이 악을 물리치는 '히어로'가 아니라, 현실의 비참한 전쟁을 재현하고,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병기'로 로봇을 취급한다. 명분 없는 전쟁은 숱한 희생을 쌓지만, 원인은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 참극에도 고작 20년 후에 더한 세계대전을, 그 후로도 전쟁이 이어지듯, 우주세기 역시 앞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채 희생 규모만 초월적으로 거대해진다.

아무로와 샤아는 전쟁을 겪으며 때론 원수로, 때론 동지로 십여 년을 봐왔다. 인정을 넘어 애증에 가까운 관계이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한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며 일어난 진화의 효시인데도, 세상은 그들을 유용한 '병기'나 선전 도구로만 취급한다. 우주 이민 처지를 알지 못한 채 관성에 빠진 지구 거주민, 위험한 우주로 추방된 한이 서린 이민 간에 골은 깊어지고, 이질감은 심화한다. 기술 발전으로 인류 스스로 멸망할 위험도는 증가하고, 전쟁으로 쌓인 원한은 복수에 복수를 더한다. 한편으론 평화와 화해를 바라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둘은 인류 전체의 고뇌를 각자 짊어지고 숙명의 승부에 나선다. 양자 모두 논리와 사상을 갖췄다. 목숨을 걸고 각각 지원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그들의 기구한 인연을 가까운 이들은 모두 잘 안다. 한때 그들은 서로를 동지로 삼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을 원수로 만든다. 그렇게 최후의 대결이 영화 내내 벌어진다.

샤아는 지구에 인류가 사는 게 문제의 본질이라 믿는다. 인류는 모두 우주로 나와 살고, 환경을 복원해야 한다는 극단적 결심은 <역습의 샤아>에서 인류 존망을 건 작전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갈등 해결이 안 되니 원인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지구 거주자를 '숙청'하는 악역을 짊어지겠다는 샤아 vs 평화를 희구하는 소박한 선의를 믿어보자는 아무로와 양 쪽에 목숨을 건 이들의 죽고 죽이는 사투가 장렬하게 그려진다.

처음 보는 이들은 당대 기술과 창의의 극한에 근접한 <역습의 샤아>가 선보인 화려한 로봇들의 우주 전투에 시선을 빼앗기는 데부터 시작할 테다. 물론 건담 시리즈의 근본 매력이 모빌슈트라는 리얼로봇에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건담에 맛을 들이게 되면 '모빌슈트는 거들 뿐', 현실의 전쟁과 다를 바 없이 우행을 반복하는 우주세기와 인물들에 관해 감정을 이입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이나 영화 속에서나 전쟁을 일으키는 기득권의 오만과 이에 희생되는 평범한 이들의 비애, 소년병이 동원되고 병기 개발을 위해 인간을 인위적으로 개조하는 잔혹함이 '리얼'하게 구현된다. 가상의 배경이라 해도 2차 대전의 비참한 현실과 전후 격렬한 사회운동을 체험한 제작진의 로봇 전쟁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 차이를 확인하고 싶다면 <역습의 샤아>는 모범적인 예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작품정보>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機動戦士ガンダム 逆襲のシャア
Mobile Suit Gundam: Char's Counterattack
1988|일본|리얼로봇/SF/전쟁 애니메이션
2025.05.07. 개봉(롯데시네마 단독)|120분|12세 관람가
원작/각본/감독 토미노 요시유키
목소리 출연 후루야 토오루, 이케다 슈이치, 스즈오키 히로타카 외
수입 ㈜에스피오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배급 ㈜미디어캐슬
기동전사건담역습의샤아 토미노요시유키감독 이케다슈이치 건담시리즈 후루야토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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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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