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한 장면.
넷플릭스
<폭싹>에는 무뚝뚝한 부상길과 다정한 양관식(박해준), 두 명의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 캐릭터가 등장한다. 최대훈은 자신이 연기한 상길과 달리, '본캐'는 오히려 관식에 가깝다며 아내가 직접 인증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부상길은 실제 극 중 이름보다는 그의 시그니처 대사에서 유래한 '학씨 아저씨'로 더 유명해졌다. 겉으로는 얄밉고 안하무인인 전형적인 빌런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그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최대훈의 열연은 표현이 서툴지만 마냥 미워할 수없는 학씨 아저씨의 복합적인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요즘엔 본명보다 학씨 아저씨로 더 많이 불린다는 최대훈은 "제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최대훈은 "처음 캐스팅되고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자리에서 '이 인물은 빌런인데, 빌런이 아닐수 있다'와 '미워야하는데 밉지않아야 한다 나빠야하는데, 나쁘지 않아야한다'는 상반된 주문을 받았다"고 털어놓으며 "제 역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깨가 무거웠다"고 회상했다.
다른 주요 배우들이 청년(박보검, 아이유)과 중장년(박해준, 문소리) 역할의 배우가 각각 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학씨 아저씨는 최대훈이 홀로 30대에서 60대에서 이르기까지 모두 소화해야 했다. 최대훈은 "젊은 사람이 노인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공원에 가거나 전철의 노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소리 지르며 전화통화 하는 노인, 멋쟁이처럼 차려 입었지만 어깨에는 비듬이 앉혀 있던 노인, 운동복에 구두를 신은 노인 등 여러 분들의 모습을 통해 노년이 된 부상길의 디테일을 채워나갔다"고 밝혔다.
배우의 애드리브가 빛난 장면들도 있었다. 학씨가 극 중 애순에게 정강이를 얻어맞고 작업복 바지를 벗어 던지며 아파하는 장면, 자전거를 타고 묘기를 부리는 코믹한 장면 등은 모두 최대훈의 애드리브였다.
특히 노년의 부상길을 보면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며 공감한 시청자들이 많았다. 최대훈은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부상길에는 제 아버지의 모습들이 들어가 있기도 한다"면서 "자전거 장면에서 부상길의 옷 배합은 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입으셨던 차림과 비슷했다. 의상을 입는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순간 확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더 힘을 얻어서 연기했다"고 고백했다.
부상길의 독특한 말투나 표현도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많았다고. 최대훈은 과거 아들의 배우생활을 궁금해하던 아버지의 서툰 질문과 농담을 무뚝뚝하게 무시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럽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잘 웃어주면서 아버지에게는 왜 그랬을까 싶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들도 이제는 이해가 되더라"
<폭싹>으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부터 최대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사랑의 불시착>·<괴물>·<전란> 등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꾸준히 존재감을 알려온 배우였다. 어쩌면 배우에게 최대의 극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마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아보인다'는 평가에 대하여 최대훈은 "이런 말들이 저에게 힘이 된다"고 고마워했다.
무명의 시간
▲<유 퀴즈 온 더 블럭> 중 한 장면tvN
최대훈은 2004년 연극무대를 시작으로 배우 생활을 이어왔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약 18년에 걸친 무명 기간을 거쳤다. 정작 최대훈 본인은 "동료들이 먼저 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크게 배가 아프지는 않았다"면서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 덕에 흔들리지 않고 배우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물론 긴 무명 시절 동안 힘든 순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는 최대훈은 "다행히 부모님께서 그런 DNA는 주시지 않았다"면서 "제가 타고 있는 자전거에 빗대어, 멈추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최대훈은 농반진반으로 가족들에게 성공할 때까지 항상 "12년만 기다리라"고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다고. 가족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굳이 '12년'으로 잡은 이유에 대해서는 "딱 떨어지는 건 싫어한다. 10년에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2년 정도를 더 했다. 결과적으로는 약속을 지키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며 웃었다.
실제로 최대훈은 이후 배우로서 자리를 잡으며 약속을 지켰지만 안타깝게도 부친은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게 좋은 차를 사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못 사드렸다. 너무 빨리 떠나셨다"며 아쉬워했다. 신혼 시절에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다행히 아내가 잘 기다려줬다. 요즘은 아내가 제 앞에서 '너무 좋아(폭싹에서 애순의 대사)'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 때면 좋으면서도 울컥한다"며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최대훈은 지금도 아내와 결혼식을 올릴 때 바라보던 주변의 일부 시선이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밝혔다. "결혼식 때 아내의 지인들이 너무 축하한다면서도, 저를 보고 '남편이구나, 음....' '어떡해'라는 반응을 실제로 목격했다. 악담은 아니고, 아내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이를 꽉 깨물었다. '보여줄게, 해낼 거야'라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무명 시절에 처음으로 출연료 인상을 요구했던 일화도 있었다. 당시 최대훈은 딸이 갓 태어난 데다, 출연료 협상을 대신해 줄 소속사조차 없던 시기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최대훈은 "'30만 원을 더 주시면 100만 원어치를 더 잘할게요'라고 뻔뻔한 말도 했다. 거짓말은 아니고 다짐이었다. 그런 말을 해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18년 무명의 터널을 딛고 최대훈은 드디어 자신의 계절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계절로 치면 지금이 봄인 것 같다. 대학교 합격하고 결혼했을 때, 아이를 낳았을 때가 다 봄이었지만, 지금이 너무 화창한 봄인 것 같아서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떠나보내기가 너무 아쉬워서, 빨리 다음 계절도 준비해야 하는데 자꾸 봄에서 놀고 싶어서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백상예술대상 후보에 지명된 최대훈은 소속사 대표와 "백상까지만 즐기고 그 다음에 정신 차리고 다시 열심히 하자고 약속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으로 미래에 대해서는 "또 다른 모습의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지, 기다리면 온다는 걸 경험했으니까 조금은 힘이 생긴 것 같다"고 희망을 전했다.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하며, 최대훈은 한편으로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지금 순간을 못보여드린게 마음에 걸린다"고 아쉬워했다. 최대훈의 부친은 뇌출혈로 쓰러져 11년간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최대훈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최대훈은 아버지와 이별해야 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대훈은 "아버지가 지금의 저를 보신다면 '요번 주일에 오니?'라고 물어보실 것 같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좋은 승합차를 사서 친구분들이랑 노년을 즐기게 해드리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아빠가 배우인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어디 나오는지 모르니까 속상하셨을 거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 주시는 요즘, 아빠랑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이런 꽃길만 거닐어도 좋아하셨을 것 같다"며 "저를 '학씨'라고 알아봐 주는 팬들 앞에서 "저희 아버지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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