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극 <귀궁>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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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의 <삼국유사>는 이무기가 본래 서해용왕의 아들이었다고 알려준다. 이 책에는 이무기가 유리 리(璃)가 들어간 이목(璃目)으로 표기돼 있다. 이목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환하는 보양(寶壤)법사를 따라 신라를 향하게 됐다. 아버지 용왕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
<삼국유사> 제4권에 수록된 '보양이목' 편은 귀국 길에 용궁을 방문한 보양법사에게 용왕이 당부의 말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용왕은 "지금 삼국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佛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에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적군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또한 몇 해가 안 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라고 일러준다.
용궁 왕자 이목과 함께 신라에 가서 작갑사를 지으면 불교를 옹호하는 어진 군주가 삼국을 평정하게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용왕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이 만남이 이뤄진 시점은 한반도 본토에서는 신라·후고구려·후백제가 후삼국의 경쟁을 벌이고 제주섬에는 탐라왕국이 있었던 때다. 이런 시기에 용왕이 이무기를 파견한 것은 불교 전파와 더불어 한반도 본토의 통일을 위해서였다.
<고려사>에 인용된 <편년통목>에는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 서해 바닷물에 빠졌다가 서해용왕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작제건이 용왕의 딸과 혼인했으며 여기서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이 태어났다고 <편년통목>은 서술한다.
이 같은 신화 때문에 고려 왕실은 서해용왕의 자손으로 알려졌다. 그런 관념이 지배하던 고려시대에 서해용왕의 아들인 이무기가 후삼국 통일 직전에 고려에 왔다는 설화가 형성되고 그것이 <삼국유사>에 담겼다. 태조 왕건과 같은 혈통이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이무기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될 수 없었다. 이무기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현대 한국의 정서와는 이질적인 환경이 고려시대에 존재했다.
옛 이름이 작갑사였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의 내력을 전해주는 <삼국유사> 보양이목 편은 보양법사가 용왕의 말대로 작갑사를 지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사찰명을 운문사로 바꿨다고 알려준다.
보양법사가 이 절의 최초 건립자는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절터에 새롭게 지었다. <삼국유사>에도 이 과정이 기술돼 있다. 그런데 그가 작갑사를 중창한 시점은 <삼국유사> 기록과 약간 다르다. 보양법사의 중창 시점은 후삼국 통일 직후로 알려져 있다.
보양법사와 함께 한반도에 온 이목은 작갑사 옆의 작은 연못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법사의 포교를 도우며 살았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파국을 맞는다. 지독한 가뭄이 발단이 됐다. <삼국유사>는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했다"고 기술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무기
▲SBS 사극 <귀궁> 관련 이미지.SBS
드라마 <귀궁>의 이무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 이무기 강철은 자신이 승천하지 못한 것이 인간 때문이라며 증오심을 드러낸다. 이는 후대의 구비전승 과정에서 이무기의 이미지가 변형된 결과이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무기는 그와 달리 인간에게 선행을 베푸는 존재였다.
<삼국유사>보다 66년 전인 1215년에 나온 승려 각훈의 <해동고승전> 원광 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삼국유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해동고승전>에서는 보양법사 자리에 원광법사가 있고 용왕의 아들 자리에 용왕의 딸이 있다는 점이다.
원광법사의 열혈 팬인 <해동고승전>의 용녀(龍女)는 가뭄을 걱정하는 원광의 말을 듣고 비를 내려준다. "갑자기 남산에 아침 무지개가 생기더니 식전 내내 비가 내렸다"고 <해동고승전>은 기술한다.
가뭄에 허덕이는 대중을 위해 '인공강우'를 만들어준 것은 착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의 노여움을 일으켰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이것은 천제가 지정해준 직분을 위반하는 일이었다. 용왕의 딸은 법사의 부탁을 받고 비를 내리기 전에 "만일 제가 함부로 비를 내리게 되면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질을 줬다. 하늘이 노한 것은 악행 때문이 아니라 월권 때문이었다.
천제는 마음대로 비를 뿌린 자를 처벌하기 위해 천사를 파견했다. 이목은 겁을 먹고 법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법사는 그를 침상 밑에 숨겨준다. <해동고승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묘사돼 있다.
천사는 사찰 뜰에 내려와 법사의 면전에 선다. 그런 뒤 "이목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법사는 하늘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의 보양법사는 '이목'이 있는 데를 가리킨다. 그곳에는 이목(梨木)이 있었다. 천사는 법사가 지목한 배꽃나무를 향해 벼락을 내리친다.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고, '이목'은 부러진 채 쓰러졌다.
<삼국유사>의 보양법사는 행동으로만 거짓 정보를 제공했을 뿐 언어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해동고승전>의 원광법사는 언어로도 그렇게 했다. 이목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들은 원광법사는 배꽃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이 변해 저 나무가 됐으니 그대는 저것을 때리시오"라고 일러준다.
두 고려시대 문헌은 이무기가 하늘의 저주를 받은 것은 월권적으로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적어도 문헌상으로 보면, 이것이 이무기 설화의 원형이다. 이랬던 것이 후대의 구비전승 과정에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이무기의 이미지가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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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