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록달록>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2.
"다홍이는 색을 보지 못해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보는 색을 보지 못해요."
홍승기 감독의 영화 <알록달록>에는 색맹인 다홍이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색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아이다. 단순히 특정한 색을 인지할 수 없는, 일반적인 의미의 색맹은 아니다. 자외석이나 적외선처럼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빛까지 볼 수 있기에 더 풍부한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조금은 특별한 색맹이다.
이 작품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감독은 일반적으로 '정상'이란 언제나 다수의 개념이었다고 말한다. 다수와 소수의 관계를 뒤집고 허물어, 모두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독특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완성해 냈다.
이 작품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중심인물인 다홍이 '색맹'이라는 것을 영화의 초반부에서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이 가진 신체적 핸디캡은 그 자체로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고, 이를 문제화시켜 이야기를 쌓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순서만 바꿨을 뿐인데 이 자체만으로 타고난 신체적, 기능적인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여겨져서다.
또 다른 하나는 색맹 자체를 기존의 의미인 '특정 색상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빛과 색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시광선 안의 빛만 볼 수 있는 데 반해, 극 중 다홍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인식할 수 있고, 특정한 한 가지 색이 아닌 다양한 색상이 투영되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빛과 색을 볼 수 있는 그가 색맹인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허락된 것만 볼 수 있는 다른 사람 모두가 색맹이라는 것. 영화는 이야기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는 시점에서부터 그런 다홍의 눈에 보일 찬란한 세상의 색을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그의 편을 들기 시작한다.
03.
"하늘이 파란색이야 빨간색이야? 아까는 빨간색이 초록색이라고 하더니. 너 왜 계속 말을 바꿔!"
물론 새로운 설정과 해석에도 '다름'으로 인한 문제는 생기기 마련이다. 다홍의 색맹이 잘못된 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표현, 해석에 다름을 가져올 수밖에 없어서다. 영화는 이 부분을 하나로 결정할 수 없는 세상의 색을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한 다홍과 그런 다홍의 말에 점차 혼란스러워지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이야기의 '사건'을 타고난 기능이 아닌 관계성의 방향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타인과의 관계 문제는 색맹이 아니어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반적인 어려움에 속한다. 그래서 영화는 다홍을 같은 문제를 마주하게 만든다. 이제 아이들은 다홍이 색맹이어서가 아니라, 왜 색깔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지기 시작한다(영화의 처음에서는 다홍의 색맹이 어떤 의미인지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의 다름으로 답답해하거나 타박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이때는 이미 관객들에게 다홍이 바라보는 세상이 몇 차례 보여진 상황. 다홍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 붓과 물감을 든다. 종이가 아닌 동네 골목 위로.
▲영화 <알록달록>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4.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표현하는 방식과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인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경계의 존재 여부는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들 수 있다. 손이 닿는 곳마다 페인트 물감으로 덧칠해 버린 다홍은 조금 후련해진 모습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적어도 어떤 특정한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색을 말 대신 물감으로 나타낸 것만 같아서다.
이 소란으로 인한 현실적인 문제가 모두 언니인 연지의 몫이 되면서 다시 다홍에게도 마음의 짐이 더해지지만 영화는 이 불편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프레임 속 모두를 색이 존재하지 않는 흑백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흰색 붓을 든 다홍이 세상의 모든 색을 지워버리는 식의 판타지를 활용하며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 놀란 마음은 있어도 불편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제 빨간색이 뭔지 모르잖아. 우리가 다시 이름 붙여주면 되잖아."
이제 아이들은 이전 세상에서 배우고 알아 왔던 색의 정체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다. 까끌까끌한 색, 엄청 진한 그림자색, 어두운 그늘 색, 그리고 가로등 색. 예전과 같은 알록달록한 세상은 더 이상 없지만, 여러 가지 빛깔을 다시 그려내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는 순간이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 <알록달록>이 동화 같은 이야기로 그 지점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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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