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 스틸컷
넷플릭스
상황은 베르고글리오의 책임 아래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반정부 활동에 나서면서 급박하게 돌아간다. 베르고글리오는 가톨릭의 세를 지키고자 신부들의 활동을 금하려 들지만, 신부들은 그에 따르지 않는다. 서약에도 불구하고 제 명령에 불응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신부들에게 베르고글리오는 분노를 느낀다. 그는 이들의 지위를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된다.
치외법권적 지위를 일부나마 발했던 신부복이 벗겨지는 순간, 이들은 기댈 곳 없는 반정부인사로 전락한다. 가톨릭과 예수회가 신부들의 지위를 정지시킨 틈을 타서 군부는 이들을 연행해 고문한다. 상황이 이리 흘러갈 줄 몰랐던 베르고글리오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날의 결정을 후회한다.
어찌 실수 없는 인간이 있을 수가 있을까. 예수조차도 십자가에 매달려 저를 죽도록 한 아버지를, 그러니까 신을 원망했는데 말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는가' 하는 물음이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변주돼 울려 퍼질 수가 있다.
신이 있다면 어째서 전쟁이, 고통이, 수많은 비명과 폭력과 갈취와 갈등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어질 수 있겠다. 일평생 수도의 길을 걸어온 교황과 추기경이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수와 실패 앞에서 그래도 희망이 되는 것은 가능성이다. 나아질 수 있다는, 언젠가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란, 그리하여 구원을 바라보는 가능성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아짐은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오늘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 부활한 예수와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두 교황>의 주제를 한 마디로 집어내자면 '변화'가 아닐까 한다. 극중에서도 변화와 타협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를 두고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 깊게 담겼거니와,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고글리오의 삶 가운데서도 중대한 변화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일생 처음으로 신의 존재와 신앙을 의심한다. 도저히 그 사상에 동의할 수 없는 베르고글리오에게 제 자리를 넘길지 또한 고심한다. 베르고글리오는 과거 잘못된 선택으로부터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 처음 한 여자를 사랑했던 그가 신의 음성을 듣고 사제서품을 받은 것처럼, 은퇴를 생각했던 그는 교황이란 막중한 책임을 지기를 각오하기에 이른다.
어디까지가 변화이고 어디까지가 타협인지를, 타협이 필요 없어지는 본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을 <두 교황>은 깊이 있게 응시하려 든다. 변화는 곧 타협이라던 베네딕토 16세는 진정으로 변화하고, 둘 사이엔 명확한 차이가 있다던 베르고글리오는 마침내 타협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제 삶 가운데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가톨릭교회 최고 성직자인 교황과 추기경을 영화는 고위직 사제로서만 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고, 나약함의 징표 또한 확인된다. 편견과 고정관념, 아집과 오만이 이들 가운데 수시로 고개를 들이민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이 그저 나약함에 주저앉는 존재가 아니란 걸 동시에 확인한다. <두 교황>은 마치 베드로가 온 길을 되돌아가 역십자가에 박히기를 선택했듯, 기꺼이 그와 같은 길을 택하는 나약한 인간들을 내보인다. 약함에서 덜 약함으로, 악함에서 선함으로, 매 순간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를 치열하게 긍정해 낸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
▲<두 교황> 포스터넷플릭스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교황에 오른 프란치스코는 전 세계를 돌며 진보적 발언을 거듭해 화제를 모았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침몰참사 유가족을 면담하고 애도를 표하며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일시적이나마 가톨릭에 신규 신자수가 급증할 만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단 평가도 있었다. 동시에 바티칸의 여러 스캔들을 비롯해 가톨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단 비판도 적잖았지만, 대외 호감도만큼은 역대 가장 좋은 교황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고령에 따른 각종 질환으로 지난 2달여 간 집중치료를 받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은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린다. 종교의 권위가 추락하고 신도수가 감소하는 세계적 추세 가운데서, AI를 비롯한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에 따르지 못하는 종교의 현실 사이에서, 무엇보다 전쟁과 기후위기, 극우정치의 도래란 위기의 징후 앞에서 가톨릭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이 영화가 묻고 있다.
이 시대 우리는 모두 베드로다.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심지어는 비종교인이라도 모두가 베드로다. 우리는 나약하다. 불완전하다. 그리하여 자주 못 한 선택을 한다. 비겁하고 탐욕스러우며 돌아보기 부끄러운 일들도 수시로 거듭한다.
다행한 건 베드로가 못나게 죽지는 않았단 것이다. 베드로는 제가 해낼 수 있는 가장 용감한 걸음으로 뜻있게 삶을 끝마쳤다. 의심하고 부정하며 도주했던 그가 다른 누구도 쉬이 해낼 수 없는 위대한 결정을 한다.
그가 죽은 자리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섰고, 오늘의 번성한 교회가 일어났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대로, 예수가 베드로가 되고 베드로는 또 다른 이들이 됐다. 프란치스코 또한 한 명의 베드로가 아닌가. <두 교황> 속 불완전한 프란치스코에게서 이 시대 흔들리는 교회와 세상의 희망을 찾는 건 그래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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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