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4년 전, 르네 젤위거는 살을 찌우고 영국식 억양을 가진 서른두 살의 여성이 돼 스크린 앞에 섰다. 런던에 사는 젊은 싱글 여성 브리짓(르네 젤위거 분)이다. 2001년 개봉했던 시리즈의 첫 작품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에서 그는 인권 변호사 마크(콜린 퍼스 분)와 직장 상사인 다니엘(휴 그랜트)와 함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아름다운 외모와 사랑스러운 행동으로 완벽에 가까운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브리짓은 그렇지 않았다. 실수투성이인 데다 왈가닥 같은 면까지 있어 온몸으로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결점으로 비칠 법한 모습들을 스스로 품어내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더 나아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두 편의 작품이 더 제작됐다. 2004년의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애정>(2004)에서는 연인인 마크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해가 그려졌고, 오랜 공백 이후 공개된 세 번째 시리즈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2016)에서는 임신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15년에 걸친 세 작품을 통해 한 여성의 삶 전체가 비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사이 전 세계 관객은 '브리짓 존스'라는 캐릭터를 르네 젤위거라는 배우와 동일시하기에 이르며, 그에게 주어질 다음의 삶을 궁금해하게 됐다.

02.
"인생엔 환한 날들도 있고 어두운 날들도 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2025)는 세 번째 이야기였던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이후 9년 만에 공개되는 브리짓의 새로운 이야기다. 스크린 밖의 시간이 흐른 만큼, 극 중 인물의 나이도 어느덧 50대에 접어들었고 얼굴에는 그만큼의 주름도 늘어났다. 싱글 여성을 연기했던 첫 작품 속 상황과는 달리 이제는 아들 빌리(캐스퍼 크노프 분)와 딸 메이블(밀라 얀코비치 분)까지, 혼자인 삶도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가 하나 있다. 전작을 통해 겨우 찾을 수 있었던 안식처의 부재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된다. 남편 마크의 죽음. 이번 작품은 테러로 남편을 잃은 지 4년째에 접어든 브리짓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상실은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는다. 송두리째 빼앗긴 공간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하는데,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공백이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어서다. 이번 작품 역시 시작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졌음을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다만 조금 무겁다. 언제나 잠옷 바람인 브리짓은 예전보다 조금 더 엉망인 채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매달려 있다. 남편의 4주기 추모 모임을 위해 집을 나서는 일이 손에 꼽힐 정도의 외출로 여겨질 정도다. 집은 항상 엉망이고, 두 아이에게만큼은 사랑을 쏟으려고 하지만 제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는 다른 말과 태도로 매번 충고질을 해오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여전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다니엘이다(이번 작품이 다니엘을 활용하는 방법이 인상적이다. 그는 이제 플라토닉한 의미로 브리짓의 곁을 지키는 연인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이번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된 화제는 새로운 사랑에 있다. 단편적으로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자리를 대신할 존재이자, 근원적으로는 생의 동력을 잃은 듯 보이는 인물을 일으켜 세울 사건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영화도 브리짓이 다시 용기를 얻고 제대로 살아보기로 하는 계기로 이성이 아닌 아버지와의 약속을 떠올리게끔 장치한다. '제대로 살 것이라고 약속'하라던 병상에서의 유언이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03.
"난 엄마이기만 한 게 아냐."

첫 시작은 매사에 흥분하지 않는 일과 다른 학부모 앞에서 쫄지 않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세상으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것뿐인데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풀려나간다. 징글맞게 완벽하지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보모 클로이(니코 파커 분)를 만나고, 전 직장인 방송사에서도 다시 일하게 된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마주했던 공원 순찰관 록스터(레오 우달 분)와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벗지 못한 잠옷도 더 이상 입지 않는 그녀다.

물론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다. 좋아 보이는 날들 아래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잠시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문제가 브리짓의 마음을 짓누른다. 나이다. 록스터의 나이를 처음 듣던 순간부터 이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은 했던 것 같다.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 그저 한 번쯤 자신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다면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을 지우고 오롯이 브리짓이라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 걱정이랍시고 주변에서 해오는 관심과 조언 역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스터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타던 날, 한 편의 영화처럼 눈과 귀를 마비시킨 이야기로부터 깨버리고 만다.

04.
그동안 이 시리즈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를 브리짓이라는 인물에게 던지고 풀어보라며 재촉하곤 했다. 너무나 다른 두 남자의 사랑 사이에서(1편), 연인에게 자신의 인생을 모두 맡겨도 되는가 하는 문제 안에서(2편), 또 임신이라는 커다란 과업 앞에서였다(3편). 이번에도 하나의 문제가 주어진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누군가와의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누구도 모두 선택할 수 없는 너무나 다른 두 모양의 삶.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위한 삶과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삶 사이의 선택이다.

"당신은 멋진 두 자녀를 둔 싱글맘이에요."

영화 초반부에 친구 미란다(사라 솔매니 분)가 틴더 앱을 깔아주는 장면이 있다. 소호에서 신문을 읽고 샴페인을 마시며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삶을 살아가는 그는 이 지점에서 브리짓의 삶이 부럽다고 말한다. 구질구질할지는 모르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매 순간 울리는 핸드폰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럽다는 말이 거짓이거나 성급한 위로를 위해 위장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미란다에게도 그런 삶은 역시 주어지지 않은, 자신의 커리어를 선택한 일에 대한 기회비용일 것이라서다.

후반부 리처드의 병실 장면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반복된다. 심장 문제로 검사를 받게 된 그는 예쁘고 젊은 여성만 쫓아다니며 평생을 소비한 자신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며 고백한다. 두 아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브리짓의 모습을 보면 부럽다고 말이다. 그의 말도 진심일 것이다.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된 순간의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이유는 없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삶과 타인이 평가하는 삶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많은 부분에서 그려지고 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두 가지 삶의 형태 가운데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영화 기저에 깔려 있는 셈이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 뉴 챕터> 스틸컷유니버설 픽쳐스

05.
"가끔 당신을 잊고 다른 일들로 슬퍼해서 미안해."

브리짓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없는 다음의 인연을 담담하게 기다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참견과 간섭에 휘둘려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입술에 이상한 약을 바르는 등의)까지 해가며 사랑을 찾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삶의 가지를 내버려둘 것인지. 어쩌면 브리짓이 슬퍼해야 하는 것은 가족을 떠난 남편 마크를 잊고 다른 일들로 슬퍼해서가 아니라, 그를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채로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나아가기만 하려 했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들 빌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내고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두 아이와 브리짓이 동산에 올라 풍선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이때 나오는 Dustin O'Halloran의 'Balloons'라는 곡이 정서를 제대로 전달해 낸다). 뒤이어 등장하는 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 꼭 여기까지다. 다만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가 브리짓이 선택하고 받아들인 선택에 대한, 그동안 안고 살아온 어떤 죄책감과 슬픔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정확히는 그런 시간에 맞설 수 있게 했던 용기와 사랑에 대한 선물이다.

06.
내게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가 단순히 즐겁고 행복한 작품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사랑스럽다는 표현 앞에 반드시 붙이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나이와 모습으로 마주해도 변치 않았던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대한 경애와 애정이 있다. 오랜 시간 속에서 축적돼 왔기 때문일까? 영화 속 캐릭터의 서사가 마치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한 인물의 삶처럼 느껴진다.

3년, 12년, 그리고 9년. 네 편 각각의 시리즈 사이에 생긴 공백의 시간이다. 이제 다음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까? 아니, 다음이 있기는 한 걸까? 시리즈가 계속돼 온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나이가 들어버린 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작품 속에서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있고 이별의 순간은 찾아오는 법이다. 이대로 끝나더라도 브리짓이라는 인물을, 그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라는 배우를 결코 잊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바람이 하나 있다면, 백발의 노인이 된 브리짓이 마지막으로, 정말 행복만으로 가득한 노년을 보내는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 그때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은 빼고, 정말 사랑스럽다는 말로만 그를 표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영화 브리짓존스의일기 르네젤위거 휴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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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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