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호러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블룸하우스' 혹은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 대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제이슨 블룸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이 회사는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더 퍼지> 시리즈, <인시디어스> 시리즈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는 2만 달러도 채 되지 않는 제작비로 2억 달러가 넘는 월드와이드 수익을 벌어들이며 좋은 영화는 적은 예산으로도 고수익을 창출해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대부분이 공포물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 역시 그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그 외의 장르에도 관심을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라라랜드>(2016)를 연출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시작점 <위플래쉬>(2013)다. 그 외에도 그리핀 던 감독의 로맨스 영화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2009), 존 추 감독의 판타지 작품인 <젬 앤 더 홀로그램>(2015), 로건 마샬 그린 감독의 <어답트 어 하이웨이>(2019) 등의 작품이 있다.

크리스토퍼 랜던 감독이 연출한 <드롭> 역시 블룸하우스가 제작한 작품이다. 호러 장르와 함께 제작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인 스릴러 쪽에 속한다. 영화는 특정 기기 사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근거리 무선 파일 공유 시스템 '드롭(Drop)'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몇 년 만에 데이트에 나선 싱글맘 바이올렛(메간 페이 분)과 데이트 상대인 헨리(브랜든 스클레너 분)의 식사 자리를 방해하는 의문의 드롭 메시지. 단순한 장난인 줄 알았던 이 연락은 헨리를 살해하지 않으면 자기 아들을 죽이겠다는 익명의 협박으로 모습을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한다.

 영화 <드롭> 스틸컷
영화 <드롭> 스틸컷IMDB

02.
"내 드롭 그만 씹어."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공간, 밀실에 기초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첫 데이트를 하기로 한 고층 건물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다. 식사를 위한 개별 테이블 외에 홀 중앙에는 커다란 바가 위치하고, 한쪽 구석에는 피아노 맨의 연주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서비스를 위한 서버만 한둘이 아닐 정도로 생각보다 큰 공간이다. 그만큼 오가는 사람도 많고 정신이 없다는 뜻. 데이트에 나선 바이올렛은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토비(제이콥 로빈슨 분)를 홀로 키우며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조차 몇 년 만일 정도로 정신이 없다. 3개월이나 문자를 주고받으며 인내심을 보여준 헨리에 대한 기대감도 그 마음을 고양하는 요소다.

그런 설정에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영화는 바이올렛이 레스토랑 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의도적인 형태의 만남을 여럿 주선한다.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바텐더 카라(가브리엘 라이언 분), 또 다른 데이트를 앞둔 연상의 남자 리차드(리드 다이아몬드 분), 그리고 피아노 맨 필(에드 윅스 분) 등이다. 이는 극 중 드롭('디지드롭'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이 15m 내에서 송수신된다는 설정은 레스토랑 내부에 위치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범인이라는 밀실 소스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03.
영화 <드롭>은 '드롭 메시지'라는 주요 소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많은 부분이 디지털 기술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소위 '디지털 스릴러'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극 중에 배치된 요소들이 영화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하나씩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홈캠, CCTV, 도청 장치, 디지털 거리 측정기, 심지어 무선 RC카 등이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홈캠은 바이올렛이 장난인 줄 알았던 드롭을 무시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다.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아들 토비와 그를 돌보고 있는 동생 젠(바이올렛 빈 분)이 현재 즉각적인 위협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어서다. 이렇게 완성된 구조는 이후 가해지는 협박들,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요구 앞에서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깊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데이트 상대인 헨리에게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협박범의 요구 때문이지만, 중반부를 지나면서 이 모든 사건의 기저에 헨리와 관련된 어떤 사건 하나가 놓여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단순히 바이올렛의 가족을 괴롭히거나 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 상대와 관련된 커다란 사건의 향방을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바이올렛의 손을 강제로 빌리려는 것. 그리고 이는 사진기자라는 헨리의 직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큰 함의를 갖는다. 실제로 다양한 상황과 수준에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내포된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처음 만나는 데이트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준비하는 자매의 모습이 제시되는 것도 단순히 서사 때문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홈캠을 통해 '보여지는' 상황, 이 공간에 함께인 것을 알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 '볼 수없는' 불특정 다수 속의 범인, 헨리의 카메라 속 SD 카메라에 증거로 보관되고 있는 '시각적' 자료.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의미와는 떨어져 있지만 존재의 죽음 이후에는 '마주할 수 없게' 되는 사랑의 의미(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지키고자 하는)까지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영화 <드롭> 스틸컷
영화 <드롭> 스틸컷IMDB

04.
"왜 나한테 메시지 보냈어요?"

상대 남성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실되게 알릴 수 없고, 내내 불안해 보이는데 이유를 말하지 않는 여성 사이의 첫 만남은 불안으로 가득하다. 바이올렛의 입장에서는 거짓된 행동을 보이면서도 그가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더욱 그렇다. 그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진심을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결혼 이력까지 있는 싱글맘인 자신에게 왜 연락하고 3개월이나 기다려줬느냐고 바이올렛이 묻는 지점이다. 두 사람이 각자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부터 묶이고 갇혀 벗어나지 못한 사정을 처음으로 주고받는다.

각자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바이올렛은 가정에서, 헨리에게는 업무 과정에서의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모두 '용기를 내고 나아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행동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직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절, 두 사람이 공유했던 하나의 동일한 가치는 현재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감금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에게는 믿음이, 여자에게는 용기가 주요한 가치가 된다.

05.
어느 정도 결말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직하게 진행되는 서사, 범인이 레스토랑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설정과 같은 몇 가지 근본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드롭>은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잘 해내는 작품처럼 보인다. 알려진 대로라면 이번 작품의 제작비 역시 1100만 달러로 그렇게 크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영화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블룸하우스의 이름값을 해낸 셈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기기 간의 드롭 기능을 활용한 질 나쁜 장난이나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품 속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부터 가해지는 디지털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오락성만 이야기하기엔 또 너무 가볍다는 생각도 든다. 바이올렛의 메시지가 하나둘 스크린 위로 덮어씌워지며 떠오르기 시작할 때, 그 문자의 크기가 점점 커지며 인물의 공간을 압박해 올 때, 이 영화가 상기시키고자 하는 현실적 공포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4월 23일 개봉 예정.

 영화 <드롭> 메인 포스터
영화 <드롭> 메인 포스터IMDB


영화 드롭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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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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